[자캐][근화]아해야

누군가라네 2015. 7. 17. 11:58

아해야.

천장으로 손을 뻗으니 누군가가 손을 잡아온다. 눈을 뜨고서 누군가를 바라보지만 눈앞이 흐릿해 잘 보이지 않는다. 만약 내 손을 잡아준 아이가, 내 손을 잡은 이가 그 아이라면 좋을 탠데.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아이라면 적어도 살아있는 모습은 보고 가는구나 하고 기뻐할 탠데. 눈꺼풀이 무거워 다시 눈을 감고, 그는 깊은 잠에 빠지기 전 마지막 정리를 한다.

그날도 별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궁에서 나온 지 일 년, 아들은 장성해서 궁으로 들어갔고 며늘아가는 똑똑해서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척척 해내었다. 그렇지만 그는 어딘가 부족함을 느꼈다. 그것은 아이. 며늘아가와 아들 사이에선 몇 년 째 아이가 생기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것은 아니나 조금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며늘아가의 잘못만은 아니기에 꾸짖지는 못하고, 아들도 별 다른 말이 없으니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어느 날, 대문 앞에 아이가 떨어졌다.

“배, 배가, 배가 고픕니다. 살려, 살려주세요!”

10살도 안되어 보이는 그 아이는 더러운 얼굴과 산발한 머리카락을 한 채 대문 앞에 엎드려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갈색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생기를 잃을 것 같았고, 말라비틀어진 손은 살짝만 건드려도 부러질 것 같았다. 그 아이가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 한 눈에 들어올 정도의 몰골이었다. 그는 아이에게서 나는 냄새와 더러운 생김새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이를 내치지는 못했다.

“안으로 들여보내 밥을 주고, 씻기거라.”

불안해하던 며늘아가는 그의 말에 기뻐하며 서둘러 아이를 안으로 들였다. 아마 저토록 어린 아이가 죽어가는 것에 약한 마음이 동한 것이겠지.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 방으로 들어 가버렸다.

아이는 역마살이라도 낀 것인지 배고픔을 해결하자마자 곧바로 떠나려했다. 그것을 며늘아가는 붙잡았고, 아이를 설득해달라는 듯 그를 불렀다. 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밖으로 나왔고, 떠나려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서 다시 뒤돌아 가려했다.

“거, 역마살이라도 끼었나. 하루 정도는 자고 가거라.”

아이는 내딛으려던 걸음을 다시 되돌리고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으로 그는 알 수 있었다. 아이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곳에서 살아왔다. 아무도, 그 어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곳. 남자도, 여자도, 노인도, 같은 또래의 아이도 믿어서는 안 되는 곳.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순수한 호의일 뿐이니 듣거라.”

아이는 여전히 믿지 않았지만 자신을 향해 꼭 자고가라고 말하는 며늘아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늘아가는 기뻐했고, 그는 좀 나아진 기분으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 아가와의 만남은, 이처럼 한순간에 다가온 소낙비와 같았다.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찾아와 한동안 깊은 물웅덩이의 형태로 남아있게 된 것이었다.

그 물웅덩이는 처음엔 무척이나 탁해보였다.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는 그가 방밖으로 나오면 마루에 앉아서 잘 놀고 있다가도 그를 노려보며 방안으로 들어간다. 며늘아가와 함께 밥을 먹고자 하면 며늘아가의 뒤에 딱 붙어서 그를 노려본다. 며늘아가가 일을 보러 잠시 밖으로 나가 둘만 남게 되면 아이는 방에서 나오질 않는다. 그는 아이와 제대로 대화를 할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다 한 달에 이틀, 며늘아가가 친정으로 가는 날이 되었다. 며늘아가는 자신 대신에 식사를 챙겨줄 이가 누구인지 그에게 알려주고, 곧잘 다녀오겠다 하고서 집을 나섰다. 자고 있었던 아이는 일어나자마자 며늘아가를 찾았고, 없다는 것을 눈치채자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거, 불안해하지 말거라. 내가 사람 잡아먹는 괴짐승도 아니고.”

그는 그간의 감정을 담아 말했다. 아이는 그런 그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이는 여전히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다가오더니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한 발짝만 움직이면 닿을 거리지만 아이는 그 거리를 최소한의 경계로 잡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아이를 가만 바라보다가 자신의 옆을 툭툭 두드렸다. 아이는 그 손짓에 반응하긴 했지만 다가가진 않았다. 그는 아이를 더 가까이 오게 하는 것은 관두고 아이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이름이 무엇이냐?”

“백근화.”

이름을 물었다.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다시 폈다. 아이다. 아직 어린 아이다.

“몇 살이냐?”

나이를 물었다. 아이는 머뭇거리면서 대답하지 못하다가 돌로 바닥에 작대기를 그었다. 하나, 둘, 셋…열 셋. 아이의 나이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작고 왜소한 몸은 보통의 13살 남자아이보다 훨씬 더 작았다. 그래서 많아봤자 10살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하다가 바닥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무얼 하는 것이냐?”

그는 물었다. 하지만 아이는 대답하지 않고 꽃을 그려냈다. 그 꽃은 그도 한 번은 본 적이 있는 꽃이었다. 분명 이 집 어딘가에도 심어져있을 그 꽃이었다. 아이는 한참 그 꽃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가만 아이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움찔 하더니 뒤로 물러났다. 그런 아이의 반응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사나운 산짐승 보듯이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례하게 행동 할 거라면 이 집에서 썩 나가거라!”

그는 크게 소리쳤다. 아이는 크게 몸을 떨더니 곧 울먹이는 얼굴이 되었다. 그는 그런 아이를 바라보다가 휙 뒤돌아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앉아서 그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이를 들이라고 한 것도 자신이고, 아이가 계속 여기 있어도 좋다고 한 것도 자신이다. 며늘아가의 부탁이 있었기도 했지만 자신도 생각 없이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충동적으로 소리쳤다. 어린 아이가, 그것도 험한 곳에서 자라왔을 아이가 무례한 행동이 무엇이고 어른을 대하는 방법을 어찌 알겠는가. 나이가 들어서 속이 좁아진 것인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근화 있느냐?”

그는 조심히 문을 열어 마당을 보았다. 다행히 아이는 아직 나가지 않았고, 연못 앞에서 작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가만 아이를 바라보다가 방밖으로 나가 아이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가 오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아이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가만 아이를 바라보다가 조심히 손을 뻗었다. 아이는 다가오는 손이 무서운 것인지 뒤로 물러났다. 그는 멈추지 않고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은 아이의 머리는 한손으로도 충분히 감쌀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괜찮다. 여기 있어도 된다.”

그는 부드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피하지 않고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았다. 그는 길에서 뛰어놀던 고양이를 길들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손을 내리고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도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갈색 눈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생기가 돌았다. 피부도 살구빛으로 예쁘장해졌다. 머릿결은 아직 좋지 못한 듯 보였지만 처음 왔을 때보단 많이 가지런해졌다. 며늘아가가 잘 돌봐주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넌 어디서 왔느냐?”

그가 물었다. 아이는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다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정확하게 그곳이 어디인지 그는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먼 곳이리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는 손을 내리고 가만 그를 올려다본다. 그는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당신은.”

그리고 그 고민은 아이의 질문에 의해서 쓸 대 없어져버렸다.

“무슨 일을 해?”

아이가 물었다. 그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자신이 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궁에서 무용수를 기르고, 왕을 위한 춤을 출 자들을 교육시키는 것. 그것이 자신이 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못하고, 이곳으로 와서 그저 지나가는 나날을 보내고 있을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아이의 눈빛이 바뀌었음을 느꼈다. 아이는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직감했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아이는 곧바로 그의 옷을 잡고 늘어졌다. 어른에게 올림말을 할 줄도 모르는 아이인 줄 알았더니 할 줄 알았다. 그것도 제법 무겁고, 정중한 투였다. 아이는 그동안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순진하고, 어린 아이가 아니면 내쫓을 것이라 생각했을 거라며 그는 혀를 찼다. 그리고 겨우겨우 아이를 옷에서 떼어놓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니 아무리 매달려도 소용없다!”

“가르쳐주십시오!”

하지만 유일하게 아이가 연기가 아닌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앞뒤 분간하지 않고 달려드는 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사람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이 세상엔 아직 자신을 속이는 이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리고 이 아이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것도.

“가르쳐주십시오!”

아이는 다시 그의 옷에 매달렸다. 작고 가벼운 아이였지만 나이가 있는 그에겐 제법 무거웠다. 거기다가 그런 몸에 비해서 손힘이 무척이나 세다. 그는 몇 번이고 아이를 떼어내려고 노력했지만 아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옷에 거의 묻히다시피 하며 손으로 옷을 비틀어 쥐고 매달려 있었다. 그는 점점 지쳐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아이에게 못 이기고 쓰러질 판이었다. 그는 떼어내려는 것을 멈추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그의 손길이 사라지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가르쳐주십시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는 절대로 안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네 실력을 나에게 보여 주거라.”

그렇기에 그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자신의 앞에서 춤을 추고, 그 실력이 자신의 마음에 들면 가르쳐주겠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바로 받아들였다. 자신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그는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속으로 비소를 지었다. 저렇게 어리고 마른 아이가, 거기다가 본 춤이라고는 광대들의 춤이 전부일 아이가 춘다면 무엇을 추겠냐는 것이었다. 이번에 확실히 쐐기를 박아 다시는 가르쳐 달란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다.

아이는 악기 소리 하나 없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표정은 진지했고, 손끝은 섬세했다. 눈빛은 즐거움이 가득했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이의 이름답게 마치 한 송이의 꽃이 바람에 흔들려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감탄했다. 저렇게 어리고 작은 아이가 저 정도 수준의 실력을 갖추기란 쉽지 않았다. 저것은 분명 타고난 재능, 그리고 앞으로도 더 훌륭하게 기를 수 있는 재능이었다.

“어떻습니까?”

끝낸 아이가 물었다. 그는 잠시 대답하지 않고 심호흡을 했다. 가르쳐주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기회는 흔히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나라 최고의 무용수를 길러낼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론 다신 없을 것이다. 그는 결심했다.

“가르쳐주겠다.”

이 아이를 자신이 죽기 전에 이 나라 최고의 무용수로 길러보겠노라고.

아이의 재능은 그야말로 훌륭했다. 그리고 그는 춤을 가르치면서 아이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예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하는지, 어떻게 말해야 상대의 기분을 나쁘지 않게 하는지. 그리고 아이는 글도 읽을 줄 알았다. 언문이라 알려진 글자를 읽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나마라도 읽는 것이 어디인가? 또한 아이는 시를 지을 줄도 알았다. 그렇게 수준 높은 시는 아니었지만 이를 통해 아이가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부모는 누구냐?”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 하셨고, 어머니는 저 먼 고을의 관기셨습니다.”

아이는 관기의 아들이었지만 그 사실이 기록되지 않아 태어났지만 태어나지 않은,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아이였다. 관기의 아이임에도 관노가 되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인지라,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그야말로 천운이었노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덕에 자신이 이리 훌륭한 재능을 가진 아이를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이니까.

아이의 재능은 훌륭한 정도를 넘어 무서울 정도였다. 아이의 습득 능력은 여태 가르친 그 누구보다 뛰어났고, 그것을 응용하는 능력 또한 뛰어났다. 한 가지 무용을 추는 것도 잘하지만 두 가지 이상의 무용을 섞어 자연스럽게 잇는 것도 가능했다. 궁에서 추는 무용과 기생이 추는 무용이 이토록 잘 어울릴 수 있음을 그는 아이를 통해 배웠다.

“근화야, 이리 와 보거라.”

하지만 그만큼 그는 두려워졌다. 아이에게 큰 문제가 생길까봐, 아이가 누군가의 시기를 받아 위험한 일에 휘말릴까봐.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자신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것이. 그는 두려웠다.

“내 말 잘 듣거라.”

아이와 그는 눈을 마주쳤다. 아이의 눈엔 생기가 감돌았고, 잘 먹은 덕분에 살이 올라 몸도 보기 좋아졌다. 머릿결은 무척이나 부드러워졌고, 머리를 묶는 것도 상당히 가지런해졌다. 옷도 단정하게 잘 차려 입었고, 예의도 몸에 익숙해졌다. 말투는 부드러워졌고, 웃는 표정을 지을 줄도 알게 되었다. 아이는 고작 몇 달 사이에 크게 성장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에게 아이는 아이였다.

“남의 무용을 따라하는 것은 그 누구든 할 수 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너를 기억하게 하고 싶다면 너만의 춤을 추어라. 너만의 존재 가치를 만들어 이 세상을 살아 나가거라.”

아이는 꾸벅 그에게 절을 했다. 그는 가만 그런 아이를 바라보다가 나가보라 말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아이에게 좀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를 다른 곳으로 보내기로 결정했지만 욕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이를 좀 더 자신의 품안에 두고 싶다. 아이가 자신의 손자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이가 스스로 살아나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선 더 많은 것을 보아야한다.

자신이 이 나라 최고의 무용수로 만들려고 했지만 자신이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기에 아이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붓을 들었다.

“스승님.”

며칠이 지났다. 아이는 혼자 연습하는 시간이 늘었고, 그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날은 바라보기만 하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아이는 조심스럽게 그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인지 눈을 감고 있었다. 아이는 불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뜨거웠다.

아이는 급히 방을 나가 며늘아가를 불러왔다. 며늘아가는 그의 상태를 살피고 급히 의원을 불러왔다. 의원은 여러 가지를 살펴보고 말했다. 얼마 전에 찾아왔던 마을 주민과 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다며 역병일 가능성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며늘아가는 알았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간호를 하기 위해선 가까이 다가가야만 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불안해하는 며늘아가를 바라보며 아이가 말했다. 며늘아가는 그런 아이를 말렸지만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해야만 한다. 자신밖에 못한다.

“저는 괜찮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정성을 다해 그를 돌보았다. 역병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기에 며늘아가는 식사와 물을 가져와 방 문 앞에 놓는 것 이상으론 접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근화는 방에서 잘 나가지도 않은 채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죽을 수도 있었던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다. 그러니 이번엔 내가, 내가.

“근화야.”

한 밤중에 깨어난 그는 잠들어있는 아이를 부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열로 인해서 깨어있는지 잠들어있는지 모를 상황 내내 아이가 옆에서 돌보아주었다는 것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 아이는 자신의 손자나 다름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보내고 싶지 않은, 언제나 곁에 두고 싶은 그런 아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자신은 아이를 보내야만 한다.

“다행입니다, 다시 건강해지셔서.”

며칠이 지나 그는 건강을 되찾았다. 아이는 다시 건강해진 그를 바라보며 기뻐했다. 다시 춤을 가르쳐달라 웃으며 말하는 아이를 향해, 그는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고 아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가르칠 것은 더 이상 없다. 그리고 너는 나에게 보일 것이 더 이상 없다.”

그러니 너는 이 밖으로 나가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배우거라. 그 종이는 저 아래 고을에 살고 있는 나의 제자에게 쓰는 추천서다. 그걸 보여주면 너에게 나에게 배운 것 외에 것들을 가르쳐 줄 것이야.

긴 말을 끝내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이 이상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아이를 떠나보내는 일은 많이 있었다. 자신의 밑에서 벗어나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하여 가는 경우야 수없이도 많았다. 하지만 이 아이만큼 그 어떤 말도 더 이상 해줄 수 없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이 또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아이는 그저 감사인사와 함께 절을 올릴 뿐이었다. 그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처음 왔던 때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살이 올랐다. 머릿결은 그 누구보다 부드러워졌고, 가볍게 짓고 있는 미소는 그 어떤 아이보다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널 단순한 제자가 아닌 손자로 생각했다.”

아이는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활짝 핀 무궁화처럼.

“다시, 만나자구나.”

다음에, 다시 만나자구나.

그렇게 약속했다. 그렇게 아이는 떠나갔다. 그 뒤로 그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다. 편지도 없었고, 아이가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어디서 나쁜 짓을 당한 것은 아닌지, 누군가에게 붙잡혀 간 것은 아닌지. 밥을 굶어 또 쓰려져있는 것은 아닌지, 산짐승에게 쫓기다 절벽에 떨어진 것은 아닌지. 그는 걱정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무사한 아이의 얼굴을, 환하게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아해야.”

나에게 그 웃음을 보여주렴. 나에게 네 춤을 보여주렴. 나에게로 다가와 안겨주렴. 아해야, 보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