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변화가 시작되면 그 변화는 수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그것이 자신이 모르는 것이라도.
“그런데 말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화는 고개를 돌려서 정적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똑같은 표정이다. 어찌 보면 무섭고, 어찌 보면 친근하다. 저 얼굴 안에 숨겨져 있을 수많은 감정들 또는 텅 비어있을 감정들이 궁금해진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 가장 의문이고, 가장 궁금한 것은.
“어떻게 해가 저 중천에 떠있는 대낮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실 수 있는 겁니까?”
처음 만났던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평범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정신이다. 보통 알려진 바로는 그러한 정신은 육체를 벗어나면 밤에 움직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도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알려진 지식들이 무색 할 정도로 잘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싫은가?]
싫진 않았다. 오히려 편리하다면 편리했다. 만약 그가 밤에만 움직일 수 있다면 그와 함께 다니기 위해선 위험한 밤에 걸어 다녀야 하니까. 그는 정신이지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 그는 허리에 찬 칼을 뽑을 수가 없다.
“오히려 다행입니다.”
근화는 대답했다. 밤에만 움직일 수 있었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근처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봤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강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적당한 낚시터가 있다고 합니다. 근화는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적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서 아주 조금, 기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근화는 괜시리 뿌듯해지는 것을 느끼며 작게 웃곤 길을 걸어갔다.
사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었다. 일반 사람도 아니고 귀신을, 그것도 죽은 모습까지 보았던 귀신을 다시 만나 길을 함께 한다는 게 평범하진 않으니까. 하지만 받아들이고, 그때 나누지 못했던 얘기를 나누며 며칠을 지내다보니 이것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공허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앞에 돌이 있다.]
“아.”
생각에 너무 깊게 잠겨있었다. 근화는 꾸벅 감사인사를 하고서 앞을 보고 걸어갔다. 좋은 게 좋은 거다. 깊게 생각 할 필요는 없다.
물이 흐른다. 맑은 물이었지만 얕은 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빨래를 하는 여인이나 물장구치며 노는 아이들이 제법 보였다. 근화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강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이 아래로 내려가면 적당한 낚시터가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낚싯대는 어떻게 합니까?”
[아까 실과 낚시 바늘을 사지 않았는가?]
사긴 했지만. 주머니에서 가느다란 실을 꺼내들었다. 요 며칠은 벌이가 풍족해서 여유 있게 살 수 있었다. 단지, 이걸 사고서 돈이 거의 다 떨어졌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그래서 낚싯대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하는 건 물론이고, 낚싯대로 만들기 적당하게 다듬어진 나무조차 구하지 못했다.
[굳이 나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자신감 있게 말하곤 계시지만. 낚는 것은 정적이 아니라 근화였다. 그리고 근화는 물속에 들어가서 직접 잡아본 적은 있어도 낚싯대를 이용해 잡아 본 적은 없었다. 갑자기 걱정되기 시작했다.
[요령만 익히면 된다.]
내가 알려줄 태니 걱정마라. 묘하게 자신감에 찬 목소리였다. 근화는 정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정적을 못 믿어서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걱정을 떨쳐내려고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다. 다행히 정적은 별 신경을 안 쓰는 듯 했지만 근화는 자신이 잘못 행동한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어 괜히 정적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여긴가?]
“여기 인 것 같습니다.”
강의 아래쪽에는 넓은 원모양으로 물이 고여 있었다. 아마 일시적으로 물을 가둬놓도록 만든 곳인 모양이었다. 저 멀리 아래쪽에는 물을 막고 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이렇게 지으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만 생각하던 근화는 주머니에서 실과 낚시 바늘을 꺼내들었다.
[여기 적당한 나뭇가지가 있다.]
근처 나무 아래에서 정적이 소리쳤다. 낚시 바늘에 실을 꿰고 있던 근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걸어갔다. 정적은 손으로 적당한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두께가 어느 정도 있어서 튼튼해 보이는 나뭇가지긴 했다. 단지, 근화의 키보다 좀 더 높은 곳에 붙어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안 닿나?]
“그대는 조금만 올라가면 닿겠습니다.”
정적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근화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근화는 바늘과 실을 내려놓고서 나무에 매달렸다. 몇 번 미끄러지다가 간신히 위로 올라가 정적이 가리킨 나뭇가지에 손을 뻗었다. 조금만 더 하면 닿을 것 같았다.
“아.”
닿았다. 꺾었다. 그리고 떨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잠시 흐릿해졌다가 돌아왔다. 근화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괜찮은가?]
정적은 손은 대지 못하고 그저 손을 든 채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전에 자신이 기겁하면서 넘어졌던 것 때문인가 생각하며 근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쓰기 적당한 나뭇가지를 얻었으니 된 것이다. 뼈가 부러진다거나 한 것도 없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고 실을 들어 나뭇가지에 묶었다.
[내가 괜히 무리한 말을 한 것 같다.]
“무리라면 도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보다 미끼 꿰는 법이나 알려주십시오. 근화는 낚시 바늘을 흔들며 정적에게 말했다. 정적은 고개를 끄덕이곤 손 모양과 말로 미끼를 어떻게 꿰는지 설명해주었다. 근화는 가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근처 땅을 파 지렁이를 잡아와 알려준 대로 바늘에 지렁이를 꿰었다.
[의외로군.]
“뭐가 말입니까?”
[지렁이 같은 건 못 잡을 줄 알았다.]
“땅바닥에서도 자는 사람입니다. 못 잡을 리가 없잖습니까.”
정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다시 만난 첫날에 폐가에서 자던 사람이다. 벌레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한다면 하지 못할 행동이었으리라. 근화는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가만 바라보다가 실을 잡고서 정적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걸 이제.]
정적은 강가에 서서 낚시 바늘을 던지는 시늉을 해보였다. 근화는 그 옆으로 가서 똑같이 따라했다. 조금 멀리까지 날아간 바늘은 그대로 강으로 들어갔다. 근화는 실을 느릿하게 감으면서 바늘 쪽에 시선을 집중했다. 어느정도 감았다싶을 때 감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정적을 바라보았다.
[이제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면 된다.]
“그렇습니까.”
잠시 침묵. 먼저 입을 연 것은 정적이었다.
[낚시란 이런 것이다.]
그리고 정적은 자신의 낚시에 대한 신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내용을 가만히 들으며 근화는 정적을 바라보았다. 정적의 얼굴은 묘하게 달라져있었다. 마치 어린 아이 같은, 실타래를 발견한 고양이 같은 얼굴이었다. 즐거워보였다. 처음으로 그의 감정이 읽혀지기 시작했다. 그는 무척이나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근화도 덩달아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감정이란 전염되는 것이라 했던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근화는 웃으면서 그의 말을 들었고, 가벼운 맞장구도 쳐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얘기하던 때, 드디어 실이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근화는 급히 고개를 돌려 바늘 쪽을 바라보았고, 정적도 얘기를 그만두고 어떻게 낚아야 하는지를 말해주었다.
천천히 실을 감았다. 서서히 속도를 올려 실을 감는다. 실 끝에서 묵직한 것이 느껴진다. 근화는 서두르지 않았다. 정적이 알려준 대로 차근차근 물고기를 낚아 올렸다. 손에 실이 파고든다. 꽤 큰 것이었는지 상당한 힘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근화는 실을 놓지 않았다.
“아!”
[오.]
팔에 힘을 실어 강하게 잡아당겼다.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튀어 올라 근화에게로 떨어졌다. 근화는 당황한 표정으로 잉어를 바라보다가 두 손을 뻗어 품에 안았다. 잉어는 크게 몸부림쳤다. 그 길이는 근화의 팔도 넘을 것 같아보였다. 근화는 두 손으로 단단히 잉어를 끌어안고 정적을 바라보았다.
“낚았습니다!”
정적은 그런 근화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근화는 방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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