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되새겨도 그 시절이 돌아오진 않지만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기에 추억인 게 아닐까?

오랜만이다. 그리덤프는 상공을 날아다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하나지방이었다. 몇 달만이지? 고개를 갸웃하면서 생각하다가 그리덤프는 일단 아래로 내려갔다. 이 근처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덤프는 곧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발견했다.

그리덤프는 나무열매를 따다가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머니도 그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덤프는 가만히 앉아서 무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바라본들 여기서 눈물을 흘린들 트레이너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이러고 있고 싶다. 그리덤프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리덤프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읽을 수 없는 바람이 불어올 때였다. 읽을 수 없는 바람이지만 익숙한 바람이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때에 느꼈었던 바람. 그리덤프는 곧장 날개를 펴서 날아올랐다. 높게, 더 높게 날아올랐다. 그리고 초록빛이 보였을 때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레쿠!”

그리고 소리쳤다.

“그리덤프?”

오랜만에 만난 친구였다. 그리덤프는 레쿠를 올려다보았다. 레쿠는 곧 아래쪽으로 내려와 그리덤프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그리덤프는 그런 레쿠를 바라보다가 따라 웃었다. 무척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였다. 거처를 신오지방으로 옮긴 뒤부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애초에 레쿠에게 거처가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레쿠쟈다. 레쿠쟈는 오존층을 날아다닌다. 그리덤프는 보지도 가지도 못 할 곳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레쿠가 물었다. 그리덤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휘청였다. 이 이상으로 날고 있는 것은 위험했다. 난기류의 원인인 레쿠는 멀쩡한 것 같았지만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그리덤프에겐 이렇게 공중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아래에 주머니에 나무열매를 말려놓은 것을 담아왔다.

“차 마실래?”

좋아. 레쿠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같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덤프는 가볍게 착지하고서 주머니를 들어올렸다. 그러곤 가만 무덤을 바라보다 레쿠를 바라보았다.

“여긴 무덤이니까, 저쪽으로 가자.”

그리덤프는 앞장 서 걸어갔다. 아래로 내려온 레쿠는 흘끔 무덤을 한 번 보고서 그리덤프를 따라 걸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차를 먹기에 적당한 장소가 나타났다. 그리덤프는 그곳의 풀을 베어버리고 자신이 가져온 가방에서 찻주전자와 찻잔을 꺼냈다.

“가지고 다니는 거야?”

“네오가 챙겨줬어.”

깨진 곳이 없나 살펴보던 그리덤프는 근처에서 나뭇가지들을 꺾어와 넝쿨로 잘 엮어 그럴듯한 대를 만들었다. 레쿠는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다가 나뭇가지들을 모아와 찻주전자 아래에 잘 쌓아놓았다. 그 사이에 그리덤프는 근처 강가로 가 주전자에 물을 담아 걸어두고, 가방 가장 안쪽에 잘 싸여있던 부싯돌을 꺼내들어 나뭇가지에 불을 붙였다.

“그것도 네오가 챙겨 준거야?”

“응.”

물이 끓기를 기다린다. 불이 소리를 내며 타오른다. 그리덤프와 레쿠는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그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눴다. 어떻게 지냈는지부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까지. 예전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예전, 그곳에 있었을 때도 꽤 많은 얘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그렇게 친구가 되었지만 그곳을 나온 뒤부턴 얼마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건 그저 추억. 가끔씩 꺼내보면 그땐 그랬지 하게 되는 기억.

“물 끓는다.”

그저 그렇게 남게 되는 기억일 뿐이었다.

“잘 마실게.”

친구라는 건 지금도 변하지 않으니까.

“응.”

가끔 이렇게 만나 추억을 꺼내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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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태그]

2015. 8. 18. 18:54
해시태그
첫번째로 멘션 온 캐릭터를 두번째로 멘션 온 캐릭터가 죽인다.

-*

이건 뭘까? 눈을 뜨니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분명 눈은 뜨여져있는데, 앞도 보이는데. 마치 꿈 속을 부유하고 다니는 것만 같다. 사실 눈도 보이기는 하지만 흐릿해. 어떻게 된걸까? 어째서? 왜? 그보다 지금 계속 풍경이 바뀌고있다. 몸이 움직이고있다.

아.
갑자기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온다. 이건 뭐였지? 어떤 거였지? 움직이던 몸이 멈춰섰다. 두 손을 들어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그저 숲만 가득 할 뿐이다. 풀들만 무성 할 뿐이다. 숨을 깊게 들이마쉬고 길게 내쉰다.

아아. 기억났다.
분노였다. 분노였다. 아주 오래 전에 한 번, 아니 몇 번이고 느껴본 적 있었던 이 감정. 동족에게 무시당하고, 다른 포켓몬에게 치이고, 거대 코뿌리에게 찔렸을 때 느꼈던 감정. 왜 이 감정이 갑자기 솟구쳐 올라오는 것일까?

아. 진화다.
진화였다. 손톱이 날카롭게 자라나 있었다. 머리카락도 전보다 훨씬 더 길어졌다. 몸도 상당히 무거워졌다. 이것은 분명 진화였다. 내가 갸라도스로 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진화의 부작용같은 것인가? 이 분노는, 끓어오르는 분노는-.

이런. 두리안이다.
여태 한 명도 보이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나무를 부숴서 분노를 가라앉히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무가 아니라 강으로 돌아가 강으로 들어가면 될 거 같았으니까. 근데, 무리. 무리다. 포켓몬을 보자 참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피해! 피하라고!
속으로 소리쳤다. 속으로 계속 소리쳤다. 두리안의 놀란 표정, 박혀 들어가는 손톱, 끓어오르는 분노. 단단한 손톱은 부러지는 것도 없이 두리안의 배로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그것만이었으면 좋으련만. 손을 뽑아내고 반대 손으로 두리안의 목을 잡아 던졌다. 손가락이, 화상을 입을 거 같아.

"살인미수야-."

이 상황에서도 실없는 농담. 두리안은 안경을 꺼내 쓰고는 두 손을 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두리안의 목을 잡아 들어올렸다. 아까 내가 찌른 부위를 중심으로 붉게 변해간다. 멍하니 그 부위를 바라보다가 두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두리안의 눈에 드러난 감정. 난, 나는.

"그만."

나도, 멈추고싶었다.
비가 내린다. 차가운 비가 내린다. 온몸이 젖어간다. 변해간다. 손은 지느러미가 되고, 다리는 꼬리가 되고, 입은 벌어지며 이빨은 커진다. 감출 수 없는 분노는 붉은 색이 되어 나타나고, 지느러미에 묻은 피도 씻겨져 내려간다.

차갑게 식고있는 두리안을 바라보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분노가 식지 않는다. 분노가 식지 않는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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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는 끝났다.

남은 것은 없었다.
가만 손에서 구슬을 굴려보았다. 데구르르, 데구르르. 소리도 없이 잘도 굴러간다. 이 구슬은 방금 전까지만해도 자신이 깨져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질 뻔했음을 알고 있을까? 모르겠지. 모르겠지. 이 구슬이 무슨 생각이 있다고.

남은 것이 없었다.
가만 구슬을 바라보았다. 구슬 속에 피어있는 꽃은 여전히 시들기미도 보이지 않고 활짝 피어있었다. 내가 죽을 때 이 꽃도 시들까?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내 손은 비어있었다. 빈 손을 바라보다 탁탁 털었다.

정말 없는 걸까?
모래 위에 섰다. 발자국이 남았다. 모래가 버선에 묻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카락과 옷이 흩날린다. 뒤돌아 내기를 하던 섬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았다.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훑어온다. 다시 눈을 떴다. 다시 뒤돌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떠날 시간이다.

없다고 믿고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발걸음을 옮긴다. 모래 위에 남은 흔적은 지워지리라. 발에 붙은 추억과 미련은 언젠간 떨어지리라. 몸을 훑은 바람은 다른 바람에의해 잊혀지리라. 그리하면 남은 것은 없으리라. 이 섬에 남기고 가는 것도, 이 섬에서 가지고 나가는 것도 없으리라.

미련이 남았음을 인정하기 싫었다. 추억을 얻었음을 인정하기 싫었다. 유희가 더이상 유희가 아니게 되었음을 깨닫고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이 섬에 두고 떠나 다시 전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 다니고싶었다. 이곳을 잊어버리고싶었다.

그럴 수 없을 거 같다.

만약 나에게 연락하고싶은 구미가 있거든 새를 한 마리 날려보내주오. 그 새의 입에 벚꽃을 물려 하늘높이 날려보내주오. 그렇다면 내 그 새를 보고 다른 새에게 편지를 쥐어 날려보내리다. 아니면 강에 벚꽃잎을 띄어 보내고 그곳에서 기다리십시오. 내 그 꽃잎을 보고 사슴에게 편지를 묶어 강 위로 보내오리다.

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나겠지요.


혹여나
나를 다시 만나고싶거든 까마귀에게 벚꽃을 물리고, 까마귀 다리에 편지를 묶어 하늘로 날려보내주십시오. 내 편지에 적힌 곳으로 반드시 찾아가리다.

나의 미련과
나의 추억과
나의 어리석음과
나의 감정을

나는 이 섬에 모두 버리고 떠나오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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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화/앵연] 눈

2015. 8. 13. 11:29

그 눈은, 어쩌면 닮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기.”

숲에는 바람도 불지 않았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도 없었고, 하늘이 보이지도 않았다. 숲은 어두웠고, 바로 앞이라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환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한 밤중과 다름없었다. 그 안에서 길을 잃은 한 아이는, 겁도 없이 그 숲에서 유일하게 보였던 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곳에서 나가려면.”

머리를 덮고 있던 겉옷이 내려간다. 감춰져있던 분홍빛 머리카락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고, 벚꽃잎이 흩날렸다. 아이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의해 나뭇잎이 흔들려 소란스러운 소리를 낸다. 긴 겉옷이 바람에 흔들려 펄럭인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시선을 빼앗는다.

“그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위험하다. 그가 뒤돌아 아이를 바라보며 웃는다. 아이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재빨리 도망칠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바람이 멈췄다. 소란스러움도 사라졌다. 흩날리던 머리카락도 정돈되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런 깊은 숲 속 까지 들어왔사옵니까?”

그가 묻는다. 아이는 자세를 낮추고 꽈악 주먹을 쥐었다. 명백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그는 웃었다. 손을 들어 소매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그의 머리 위에 무언가 형체가 보이기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아이는 뒤로 몇 발짝 더 물러났다. 나무에 등이 부딪쳤다.

“왜 그리 무서워하시옵니까?”

그가 다가온다. 분명 걸어 다가오는 것이 분명한데, 마치 귀신이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아이는 나무에 등을 딱 붙이고서 최대한 주먹에 힘을 주었다. 죽는다,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기 전에 먼저, 먼저? 아이는 나무에서 등을 떼고 빠르게 뛰어갔다.

“이런.”

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한 번 강한 바람이 불었다 멈췄다. 분홍빛 귀를 쫑긋 세운 채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애초에 사람의 발길이 뜸한 숲이다. 지금 쫓아가면 분명 쉽게 잡아먹을 수 있을 터. 생긴 것도 나쁘진 않았는데.

“뭐, 나중을 기약할까.”

언젠간 또 다시 마주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엔, 간보다 먼저 그 눈을 뽑아주리라. 그, 앵연은 웃으면서 숲길을 걸어갔다. 그 눈은 닮아 있었다. 무엇을 닮아있는 진 모르겠지만 분명 닮아있었다. 마음에 들었다. 아름다웠다. 가지고 싶어졌다.

“다음에 연이 닿기를.”

앵연은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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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카시마!”

오늘도 학교에는 연극부장이 연극부의 프린스를 부르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오늘도 땡땡이를 칠 생각에 여학생들과 어울리고 있던 연극부의 프린스, 카시마 유우는 연극부장 호리 마사유키의 부름에 여학생들과 아쉬운 이별의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꼭, 다시 만나러 갈 태니까. 기다려줘, 공주님.”

“꼭, 와 줘야해.”

언제나처럼.

“카, 시, 마!”

그녀의 옆구리는 그의 정강이에 채여 큰 타격을 입는다.

“정말, 선배도 너무 하시다니까요.”

연극부실로 향하는 길, 카시마가 불평을 털어놓는다. 그런 카시마를 노려보던 호리는 평소대로의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끼고 걸어간다. 카시마는 그런 호리를 가만 바라보며 삐죽이던 입술을 집어넣고는 작게 웃는다. 자신을 그렇게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더라도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란 걸 알고 있다. 비록 아프긴 무척이나 아프지만 말이다.

“맞다. 카시마, 혹시 주말에 시간 있냐?”

“선배, 그건 혹시.”

호리의 물음에 카시마는 눈을 빛냈다. 저 물음은 분명히 그 물음의 시작이었다. 다른 여학생들과 약속을 잡을 때, 또는 친구와 약속을 잡을 때 내뱉는 그 물음. 카시마는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대었다. 이것이 꿈은 아니겠지. 주말에 선배와 약속이라니. 이런 좋은 기회를 카시마는 놓칠 수가 없었다.

“물론이죠!”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진 모르겠지만 일단 네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야.”

카시마의 행동을 가만 지켜보던 호리가 한 소리 했다. 하지만 이미 귀가 저 하늘까지 떠올라버린 카시마에게 호리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호리와 주말에 단 둘이 만나서 무엇을 하게 될지, 같이 영화를 보는 것일지 아니면 같이 연극 의상을 사러 가는 것인지, 연극 소품 제작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가려는 것인지 생각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그것을 호리도 알고 있었다.

“카시마, 네가 자꾸 땡땡이를 치니까 이번 주말에 제대로 잡고 연습할거야.”

당연히 다른 부원들도 올 거고. 확실하게 말을 하고 나서야 카시마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축 늘어졌다. 선배와 단 둘이 있는 게 아니라니. 실망 중에서도 대 실망이었다. 호리는 그런 카시마를 바라보다가 대본을 돌돌 말아 카시마의 머리를 톡 두드렸다. 평소처럼의 강한 스파이크가 아닌 가볍게 톡 치는 느낌에 카시마는 놀란 눈을 하고서 호리를 바라보았다.

“연습 안 빠지고 제대로 하면 같이 놀러가 줄 태니까.”

“선배! 저 열심히 할게요!”

금방 기운 차린다니까. 호리는 웃으면서 카시마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카시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열심히 해라. 그리고 둘은 함께 연극부실로 들어갔다.

“카시마 너.”

“네, 선배?”

오늘 카시마의 기분은 최고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드디어 선배와 단 둘이서 놀러갈 수 있게 되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이렇게 같이 놀러가기 위해서 근 일주일간을 얼마나 노력했던가. 카시마는 두 주먹을 꽉 쥐어 들어올렸다. 얼굴 표정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 평소에도 좀 하란 말이야.”

시작은 잔소리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오늘 하루 종일 선배와 함께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연극부 연습이 아닌 개인적인 만남으로. 무엇부터 하는 게 좋을까? 어제 밤 내내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두기는 했지만 제대로 결정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선배가 좋아할 만한 영화도 고민해보고, 좋아할 만한 장소도 고민했는데. 카시마는 두 주먹을 쥐어 들어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움츠렸다.

“어이, 카시마?”

카시마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호리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카시마를 부르고 있었다. 카시마는 그제서야 다시 지상으로 돌아와 호리에게로 달려갔다. 호리는 다시 뒤돌아 걸어간다.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호리는 앞장 서 걸어가며 흘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이지, 눈에 띄는 얼굴이구나 싶었다.

“선배, 선배. 오늘은 어디 가실건가요?”

“글쎄. 넌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카시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리 선배가 좋아할 만한 곳을 골라가면 분명 선배와 즐겁게 놀 수 있겠지! 그래, 어제 그렇게 고민한 것은 다 선배를 위해서였다! 카시마는 호리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저만 믿으세요, 선배!”

제가, 오늘 선배를 위해서!

카시마가 호리를 데리고 간 곳은 그야말로 분홍빛이 만발하는 귀여움이 가득한 디저트 카페였다. 벽면은 귀여운 봉재 인형으로 장식 되어있었고, 벽지도 전체적으로 파스텔톤이었다. 테이블을 덮은 식탁보는 새하얗고 레이스가 달려있었다. 그리고 주 손님은 여자이거나 커플들이었다.

“선배가 좋아하실만한 곳을 골라봤어요!”

선배는 여성스러운 것을 좋아하니까 분명 이 카페도 마음에 들어 하실 거야! 카시마는 칭찬해달라는 얼굴로 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리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카페에 들어올 때 까지만 해도 카시마도 귀여운 걸 좋아하는 구석이 있구나 생각했는데 자신이 좋아할 만한 곳이라니. 아니, 어쩌면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호리는 별 말없이 카시마의 제안에 응했다.

“선배는 뭐로 드실래요? 저는 딸기 파르페.”

글쎄. 호리는 메뉴판을 열었다. 메뉴판 또한 카페처럼 파스텔톤인 거로도 부족해서 무척이나 화사하고 화려했다. 정말 카시마가 자신을 위해 골랐다고 하기엔 믿기지 않는 카페였지만 얼마 전에 자신을 놀렸던 것을 생각해보면 카시마가 자신을 위해 골랐을만 하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이번 주말 놀이는 상이었다. 한 번쯤은 어울려줘도 괜찮겠지.

“카시마, 앞으로도 연습에 잘 참여해봐.”

그러면 이렇게 또 같이 놀러 나와 줄 태니까. 이렇게 즐거워한다면 몇 번 더 어울려줄 생각은 있었다. 그러면서 저절로 연습 참여도도 올라간다면 더 좋은 거 아닌가. 나쁠 건 없었다. 물론 지금 기분이 높게 올라간 카시마에게 그 말은 들리지 않은 듯 했지만. 카시마는 그저 좋았다. 호리와 함께 이렇게 카페에 앉아 같이 파르페를 먹을 수 있다는 상황 자체가 기뻤다. 거기다 호리가 카페를 싫어하지 않는다! 한 발짝 더 가까워지고 호리를 이해 할 수 있게 된 기분이었다.

“선배.”

“음?”

카시마가 호리를 불렀다. 호리는 창밖을 보던 것에서 고개를 돌려 카시마를 바라보았다. 카시마는 환하게 웃었다.

“다음에 또 같이 놀러가죠!”

호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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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e] 배움

2015. 8. 3. 17:25

가르친다는 것은 구원이요, 배운다는 것은 축복이니라.

 

“그리덤프씨?”

오랜만에 네오를 찾아온 그리덤프는 빈손이 아니었다. 요 며칠 보이지 않는다싶더니 이 근처를 돌아보면서 이것저것 주워온 모양이었다. 그가 들고 있는 보자기 안에는 책과 여러 가지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중에는 진화에 사용하는 돌같이 꽤 값이 나가는 돌도 있었다. 물론 그 가치는 그리덤프에게 있어서 ‘예쁜 돌’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주워왔어.”

그리덤프는 모든 짐들을 내려놓고 하나하나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 물건들은 제법 많았는데 마당을 반의 반 정도 채울 정도였다. 그리덤프는 자기가 착지하느라 파놓은 구멍을 메꿔놓고 물건들 앞에 앉았다. 네오는 그런 그리덤프를 바라보다가 그리덤프의 옆에 앉아 그리덤프를 바라보았다.

“이건 저기 동쪽 마을에서 얻어 온 거야.”

그가 가르킨 것은 천둥의 돌이었다. 그 뒤로 그는 이건 어디서, 저건 어디서 얻어왔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았다. 네오는 그저 웃으면서 그 모습을 가만 지켜 볼 뿐이었다. 물건 소개는 한참이나 이어졌고, 그것이 끝나갈 무렵 그리덤프는 책을 한 권 들어 올려 네오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분명 읽어달라는 부탁이었다.

“동화책이네요.”

네오는 그리덤프에게서 책을 받아들어 제목을 읽었다. 그리덤프는 바른 자세로 앉아서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가 잠들기 전에 동화책을 듣는 것 같아 귀엽게 느껴져 네오는 웃어버렸다. 네오는 책을 펼쳐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덤프는 네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가만히 듣고 있었다.

동화책은 그리 길지 않았다. 금방 이야기는 끝이 났고 책은 덮어졌다. 그리덤프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가만히 네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다고 한들 이야기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덤프는 알고 있었지만. 네오는 그런 그리덤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덤프씨도 글을 배워보는 건 어때요?”

네오가 물었다. 그리덤프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이라면 전에 배워본 적이 있었다. 비록 얼마 가지도 못하고 가르쳐주던 포켓몬이 떠나버렸지만 말이다. 그리덤프는 고민에 빠졌다. 만약 글을 배운다면 그렇다면 스스로 책을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오에게 자신의 진심이 담긴 편지도 쓸 수 있다. 그리덤프는 네오와 눈을 마주쳤다. 네오는 웃었고, 그리덤프도 그를 따라 웃었다.

“네오가 가르쳐줘.”

네오가 가르쳐줬으면 좋겠어. 네오의 입에 쪽 입을 맞췄다 떼고 그리덤프가 말했다. 네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 웃는 표정으로 바뀌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덤프는 웃으며 네오를 꼬옥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렇게 한동안 입을 맞추고 있다 떨어졌다.

“그럼 내일부터 가르쳐 드릴게요.”

네오의 말에 그리덤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그리덤프는 기대되기 시작했다. 자신은 글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사실 배울 생각을 해본적조차 없다. 자신은 그저 배틀을 하는 수많은 포켓몬 중 한 마리였고, 자신의 트레이너도 자신에게 글을 배우라 강요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글을 배우지 않아도 사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글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가는 길이 자신의 길이라는 생각으로 날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사랑하는 포켓몬이 생겼고,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글로 써서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글을 배우고 싶어졌다. 배울 것이다. 사랑하는 포켓몬에게, 그에게 전할 사랑의 말을.

해가 밝아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리덤프는 오늘도 하늘높이 날아올라 사랑하는 이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그에게서 글을 배운다. 어떻게 읽는지, 쓰는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첫 시작은 가벼운 철자였다. 그리덤프는 열심히 그 철자를 따라 쓰고 읽어 머릿속에 기억해두었다. 네오는 그리덤프를 칭찬했다. 그리덤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무척이나 잘 한다고, 금방 글을 쓰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네오 덕분이야.”

“그리덤프씨가 잘하시는 거에요.”

첫 번째 해가 밝아오는 게 금방이라면 당연히 두 번째도 금방이다. 오늘 배우는 것은 철자의 조합이었다. 철자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서 그 소리가 달라지고, 그 소리가 어떻게 달라지냐에 따라서 단어의 뜻이 달라졌다. 그것이 무척이나 흥미로웠지만 그리덤프는 아직 어려워했고, 네오는 그런 그리덤프에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익히면 된다고 조언해주었다. 그리덤프는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다가 네오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네오는 그리덤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자, 힘내요. 그리덤프씨.”

“힘 낼 거야.”

널 위해서.

세 번째 해 또한 금방 찾아왔다. 오늘은 드디어 단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겨우 삼 일 만에 이 정도까지 온 것도 훌륭한 것이라고 네오는 칭찬했다. 그리덤프는 쑥스러워지는 기분에 괜한 날개만 퍼덕였다. 그리고 수많은 단어들을 외웠다. 자신이 전에 가져왔던 책은 동화책,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했다. 나중엔 저 책을 읽어보며 글공부를 할 것이라고도 네오가 말해주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물의 이름을 배웠다.

“네오는 네오가 이름인거고, 나는 그리덤프가 이름인 것처럼 많은 사물엔 이름이 있어. 다 외울 수 있을까?”

“천천히 배워가면 되는거니까 조급해하지 말아요, 그리덤프씨. 제가 하나하나 알려드릴게요.”

“난, 네오가 정말 좋아.”

네 번째 해가 떠올랐다. 그리덤프는 네오를 만나러 가기 전 근처 마을에 들러 종이와 펜을 얻었다. 이것으로 써야지 오래오래 남는다고 말 한 엑스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덤프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종이에 글을 써서 잘 접어 네오에게로 향했다.

“네오.”

네오는 미리 나와 오늘 가르쳐줄 것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덤프는 그런 네오의 옆에 착지해 네오를 한 번 끌어안았다 놓아주고 네오의 손에 종이를 쥐어주었다. 그리고 잠시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리더니 날개를 펼쳐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멍하니 있던 네오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손에 쥐어진 종이를 펼쳐보았다.

그 안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사랑해, 네오’라고 적혀있었다.

“아.”

네오는 웃었다. 평소보다 더 환하게, 옅게나마 얼굴을 붉히며 네오는 웃었다. 그리고 그리덤프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그 종이를 고이 접어 자신의 주머니 안에 잘 넣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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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누군가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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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화/정적] 감정

2015. 8. 3. 13:25

언제까지고 변화 할 것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

 

[너는]

오랜만에 큰 길을 걷는다. 근 삼일 가량을 산에서 살다시피 했더니 사람들이 많은 길이 낯설었다. 앞서서 걸어가던 근화는 정적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며 걸어갔다. 길 한복판에 갑자기 멈춰 서서 뒤를 보는 것만큼 이상한 행동도 없을 태니까. 정적도 그러하단 걸 알고 있는지 그 행동에 대해 별 말 하지 않고 근화를 따라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여인과 연을 쌓을 생각이 없는가?]

근화는 휙 몸을 돌려 정적을 바라보았다. 정적은 예의 그 표정으로 근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근화는 잠시 진정하면서 할 말을 골랐다. 딱히 화낼 만한 물음도 아니거니와 별 달리 신경 쓸 만한 말도 아닌데 이상하게 신경 쓰인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근화는 그냥 생각하기를 관두기로 했다. 고개를 젓고는 다시 뒤돌아 걸어간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걸어가면서 근화가 뱉은 한 마디였다. 정적은 고개만 가볍게 까딱이며 뒤를 따라갔다. 평범한 마을이었다. 장이 서지 않았기에 오래 머물 필요는 없는 곳. 작은 마을인지라 금방 한 바퀴를 둘러볼 수 있었다. 근화는 마을 입구 근처 나무 아래에 앉아서 정적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가?]

아까 전 그 물음을 한 이유가 궁금했다. 짐작이 가지만. 딱히 깊은 생각을 하고서 내뱉은 물음은 아니었을 거다. 자신이 그러하듯이 그도 가끔씩 별 의미 없는 질문, 별 의미 없는 말, 딱히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것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물음을 내뱉으니까.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깊게 생각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근화는 고개를 저으며 말하고선 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보니 이 나무-. 근화는 멍하니 나무를 올려다보다 옆에 앉아있는 정적을 바라보았다. 일단 그가 악귀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만약 그가 악귀였다면 이 나무를 지나서 자신과 함께 마을로 들어가는 것은 무리였을 태지. 새삼스럽지만 근화는 안심이 되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재밌는 생각이라도 났는가?]

근화가 웃었다. 정적이 물었다.

“아니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을 뿐이옵니다.”

근화가 대답했다. 정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슬슬 자리를 옮겨야 할 때가 될 때까지 그대로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구름은 흘러가고, 하늘은 붉게 물들어간다. 해는 자신의 잠자리로 옮겨가고, 나뭇잎들은 바람과 재미나게 노는듯 몸을 흔든다. 정적은 말이 없었고, 근화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아아!”

슬슬 일어날까 생각하고 있었던 때에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화는 들었던 고개를 숙여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정적도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잔뜩 화가 난 얼굴을 하고서 근화에게 다가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근화는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소녀를 바라보기만 할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근화를 바라보던 정적은 목 울리는 소리를 내더니 근화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닥였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근화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죄송합니다. 오랜 여정에 다리가 아파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근화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소녀는 그런 근화를 가만 바라보다가 허리에 손을 올리더니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서 허리를 빳빳이 세운다. 소녀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계속 화를 낸다면 분명 자신만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겠지. 소녀는 이만 근화를 결정을 내리고 눈을 떴다.

“다음부턴 여기서 쉬지 말아주십시오! 이 나무는 마을을 지켜주시는 수호신의 집이옵니다!”

소녀가 소리쳤다. 근화는 꾸벅 한 번 더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소녀는 꽈악 주먹을 쥐었다. 저리 예의바르게 나오면 오히려 자신 쪽에서 기분이 묘해진다. 괜한 사람을 잡고 있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소녀는 심호흡을 몇 번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근화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제 괜찮다는 의미였다. 근화는 소녀의 손길에 고개만 살짝 들었다. 그리고 그런 근화의 귀에 정적이 또 무어라 속닥였다.

“아 좀 그만 하십시오!”

그리고 근화는 큰 소리를 내버리고 말았다. 소녀는 놀랐고, 정적은 재밌어했다. 근화는 당황했다. 소녀는 자신의 호의를 거절당했다 생각했고, 정적은 참 재밌는 반응이라 생각했으며 근화는 머릿속이 새하얘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근화는 최대한 빠르게 정신을 되돌리고, 어찌 할지를 정했다.

“죄송합니다. 그대에게 한 말이 아니었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대,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평소와는 다르게 빠르게 말을 뱉어내고 근화는 급히 뒤돌아 뛰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적은 소녀를 한 번 보았다가 근화를 따라갔다. 멍하니 혼자 남겨진 소녀는 눈만 끔뻑이다가 정신을 차리고서 크게 소리쳤다. 다음번에 보면 가만두지 않겠노라고.

 

“다 정적 때문이잖습니까!”

마을에서 멀어져 숲으로 들어왔을 때 근화는 뒤돌아 정적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정적은 자신은 아무 짓도 안했다는 듯 예의 평소 그 표정을 지으며 근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화는 더 이상 말 할 가치를 못 느꼈다. 도발에 넘어간 것은 자신이었다.

[여인과 대화 해 본 소감은?]

그리고 저렇게 태평하게 저런 질문을 건네오니 딱히 반박 할 생각도 안 드는 것이다. 근화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근처 적당한 나무 아래에 자리 잡고 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감정에 큰 동요가 온 것이 얼마만인지. 이것은 분명 그와 함께 하고 난 뒤에 생긴 변화였다. 그가 밉상일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같이 다니는 것이 나쁘진 않다는 뜻인 거겠지.

“그대는.”

근화는 고개를 들어 정적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언제까지 저와 함께 다닐 것이옵니까?”

혼자 길을 거니는 것은 외롭다. 수많은 사람이 스쳐지나가지만 그 사람 중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춤을 봐주는 사람 중에서 돈을 주는 이는 많아도 자신을 봐주는 이는 없다.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롭다. 혼자 길을 거니는 것은 가끔 울 것 같은 마음이 될 정도로 외롭다.

하지만 그와 함께 하고 나서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으면 즐거웠지 슬퍼지지는 않았다. 그가 인간이 아니긴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같이 다닌다는 것이 좋았다.

[나는.]

정적은 근화를 바라보았다. 보기 드문 감정 변화들이었다. 정적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공중에서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근화는 그런 정적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정적의 손을 쥐어보았다.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근화는 그 상태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정적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실언이었습니다. 이만 자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적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근화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정적은 그런 근화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화는 대답을 듣지 않았다. 일부러 피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적은 딱히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그다지 대답 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근화도 대답을 원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답이 두려웠다.

[잘자라.]

숲의 밤은 무섭고도 아름답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산짐승들이 움직이는 소리도 들려온다. 나뭇잎과 별들이 한 대 어우러져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내고, 달빛이 길을 밝혀주며 그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러한 숲에서 근화는 잠이 들었고, 정적은 근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해가 밝아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근화는 가벼운 몸으로 일어났다. 정적도 근화를 따라 일어났다. 근화는 가볍게 몸을 풀고는 정적을 바라보았다. 기분은 다시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근화는 평소처럼 웃었다. 그리고 손짓했다. 해는 밝았고, 하늘엔 구름이 없었다. 나뭇잎들은 바람과 노느라 자신의 몸이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 멋들어진 아침 풍경이었다.

“또 며칠 동안 걸어야합니다.”

근화가 입을 열었다.

“낚시터는 이번 달 말에 가도록 하지요.”

정적은 근화와 함께 걸었다.

[좋다. 기대되는군. 이번에도 대어를 낚았으면 좋겠다.]

정적이 말했다.

숲길을 걸어간다. 숲길에 남는 발자국은 하나. 그러나 그곳에 남은 추억은 두 명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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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누군가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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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있어? 그 때, 정말 좋았는데.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항상 달라져있다. 오늘은 수많은 글자들이 눈을 파고들어와 책을 던지게 만들어버렸다. 손으로 눈을 가리며 눈살을 찌푸렸다가 몸을 일으켜 앉아 저 멀리에 떨어져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어제 편집자가 초판이 나왔다며 갖다 준 내가 쓴 책이었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에 다가갔다. 절뚝거리는 다리는 이미 익숙하다.

“이상한 꿈을 꾸게 만들었네.”

책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서 잘 덮어 테이블 위에 얹어두었다. 가만 책의 표지를 바라보았다. 어울리지 않게 희망찬 글이나 쓰고 있으니 그런 꿈을 꾸지. 눈살을 찌푸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집에 틀어박혀서 글만 쓰다간 내가 책이랑 같이 인쇄 될 판이었다. 나가야한다. 일주일이나 집에만 있었다.

“냉장고도 비었군.”

부엌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전에 사다둔 것들이 다 떨어졌다. 확실히 떨어 질만 했다. 일주일,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니지. 고개를 젓고는 냉장고 문을 닫고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몸에서 기운이 빠진다.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었다. 허리 넘어 까지 내려올락 말락 하는 머리카락을 빗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자를 생각은 없었다.

“그나저나.”

다른 고양이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 몇 명은 짐작이 가지만 몇 명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랩실은 오늘도 순찰을 돌고 있겠지? 쿠스토는 가람이랑 같이 있을 것이고. 센은 뭘 하고 있지? 고개를 갸웃하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아아,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거칠거칠한 턱을 깔끔하게 해야 했다.

“흐음.”

깔끔하게 면도된 턱을 쓰다듬으며 거울을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저씨로군. 슬슬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서있었다. 테이블로 가 의자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저리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다가 바지를 걷어 올렸다. 발등부터 무릎까지 이어져있는 커다란 흉터는 내 다리 상태가 예전과 같지 않음을 알려온다. 이런 거,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러고보니 센도 다리가 불편하다고 했던가. 문득 떠올랐다. 바지를 내리고 가만 생각에 잠겼다. 오늘따라 유난히 센이 생각난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 다정한 말투? 목소리? 온화한 표정? 가족이 있다면 이런 가족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가족, 가족이라.

“음-.”

기억나지 않는다. 벌써 삼십년이나 지난 일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으로 가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밖에 나가야했다. 이대로 계속 집에 있다가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귀찮은 생각들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휴식이 필요했다. 예의 그 차림을 하고, 지팡이를 들었다. 수염은 붙이지 않았다.

햇빛은 적당했고, 하늘은 맑았다. 나무는 푸르렀고, 길은 걷기에 좋았다. 이 마을에 오기를 무척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향긋한 풀내음을 맡으며 가만 서 있다가 길을 걸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일주일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이곳은 변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그건 단순히 건물이나 식물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그를 바라보며 웃고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목에 따스하고 부드러워 보이는-솔직히 그것이 그를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복슬복슬한 털을 목에 두르고서 앉아있었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통 밖엘 안나오다보니.”

“글을 쓰셨나요?

“그렇지요.”

가벼운 대화가 오간다. 그가 묻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렇게 몇 번 대화가 오가면 조금씩 말이 줄어들면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는데 그 상태가 어색하다거나 하지는 않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둘 다 말은 없었지만 어색하다거나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음, 어쩌면 가족이 이럴까?

“그대.”

“네?”

남에게 의지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 가족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그건 의지하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 지탱해주는 것일까?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조금은 욕심이 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서로 의지하고, 고민을 털어놓고,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할 수 있는. 솔직히 욕심이었다. 여태까지 그런 것은 꿈도꾸지 않았다. 약해지면 곧 죽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괜찮지 않을까? 조금은 욕심내도 되지 않을까?

“그대의 이름을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대를.

“가족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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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누군가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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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화/정적] 낚시

2015. 7. 31. 13:22

한 번 변화가 시작되면 그 변화는 수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그것이 자신이 모르는 것이라도.

“그런데 말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화는 고개를 돌려서 정적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똑같은 표정이다. 어찌 보면 무섭고, 어찌 보면 친근하다. 저 얼굴 안에 숨겨져 있을 수많은 감정들 또는 텅 비어있을 감정들이 궁금해진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 가장 의문이고, 가장 궁금한 것은.

“어떻게 해가 저 중천에 떠있는 대낮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실 수 있는 겁니까?”

처음 만났던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평범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정신이다. 보통 알려진 바로는 그러한 정신은 육체를 벗어나면 밤에 움직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도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알려진 지식들이 무색 할 정도로 잘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싫은가?]

싫진 않았다. 오히려 편리하다면 편리했다. 만약 그가 밤에만 움직일 수 있다면 그와 함께 다니기 위해선 위험한 밤에 걸어 다녀야 하니까. 그는 정신이지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 그는 허리에 찬 칼을 뽑을 수가 없다.

“오히려 다행입니다.”

근화는 대답했다. 밤에만 움직일 수 있었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근처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봤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강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적당한 낚시터가 있다고 합니다. 근화는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적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서 아주 조금, 기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근화는 괜시리 뿌듯해지는 것을 느끼며 작게 웃곤 길을 걸어갔다.

사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었다. 일반 사람도 아니고 귀신을, 그것도 죽은 모습까지 보았던 귀신을 다시 만나 길을 함께 한다는 게 평범하진 않으니까. 하지만 받아들이고, 그때 나누지 못했던 얘기를 나누며 며칠을 지내다보니 이것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공허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앞에 돌이 있다.]

“아.”

생각에 너무 깊게 잠겨있었다. 근화는 꾸벅 감사인사를 하고서 앞을 보고 걸어갔다. 좋은 게 좋은 거다. 깊게 생각 할 필요는 없다.

물이 흐른다. 맑은 물이었지만 얕은 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빨래를 하는 여인이나 물장구치며 노는 아이들이 제법 보였다. 근화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강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이 아래로 내려가면 적당한 낚시터가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낚싯대는 어떻게 합니까?”

[아까 실과 낚시 바늘을 사지 않았는가?]

사긴 했지만. 주머니에서 가느다란 실을 꺼내들었다. 요 며칠은 벌이가 풍족해서 여유 있게 살 수 있었다. 단지, 이걸 사고서 돈이 거의 다 떨어졌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그래서 낚싯대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하는 건 물론이고, 낚싯대로 만들기 적당하게 다듬어진 나무조차 구하지 못했다.

[굳이 나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자신감 있게 말하곤 계시지만. 낚는 것은 정적이 아니라 근화였다. 그리고 근화는 물속에 들어가서 직접 잡아본 적은 있어도 낚싯대를 이용해 잡아 본 적은 없었다. 갑자기 걱정되기 시작했다.

[요령만 익히면 된다.]

내가 알려줄 태니 걱정마라. 묘하게 자신감에 찬 목소리였다. 근화는 정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정적을 못 믿어서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걱정을 떨쳐내려고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다. 다행히 정적은 별 신경을 안 쓰는 듯 했지만 근화는 자신이 잘못 행동한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어 괜히 정적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여긴가?]

“여기 인 것 같습니다.”

강의 아래쪽에는 넓은 원모양으로 물이 고여 있었다. 아마 일시적으로 물을 가둬놓도록 만든 곳인 모양이었다. 저 멀리 아래쪽에는 물을 막고 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이렇게 지으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만 생각하던 근화는 주머니에서 실과 낚시 바늘을 꺼내들었다.

[여기 적당한 나뭇가지가 있다.]

근처 나무 아래에서 정적이 소리쳤다. 낚시 바늘에 실을 꿰고 있던 근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걸어갔다. 정적은 손으로 적당한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두께가 어느 정도 있어서 튼튼해 보이는 나뭇가지긴 했다. 단지, 근화의 키보다 좀 더 높은 곳에 붙어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안 닿나?]

“그대는 조금만 올라가면 닿겠습니다.”

정적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근화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근화는 바늘과 실을 내려놓고서 나무에 매달렸다. 몇 번 미끄러지다가 간신히 위로 올라가 정적이 가리킨 나뭇가지에 손을 뻗었다. 조금만 더 하면 닿을 것 같았다.

“아.”

닿았다. 꺾었다. 그리고 떨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잠시 흐릿해졌다가 돌아왔다. 근화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괜찮은가?]

정적은 손은 대지 못하고 그저 손을 든 채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전에 자신이 기겁하면서 넘어졌던 것 때문인가 생각하며 근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쓰기 적당한 나뭇가지를 얻었으니 된 것이다. 뼈가 부러진다거나 한 것도 없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고 실을 들어 나뭇가지에 묶었다.

[내가 괜히 무리한 말을 한 것 같다.]

“무리라면 도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보다 미끼 꿰는 법이나 알려주십시오. 근화는 낚시 바늘을 흔들며 정적에게 말했다. 정적은 고개를 끄덕이곤 손 모양과 말로 미끼를 어떻게 꿰는지 설명해주었다. 근화는 가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근처 땅을 파 지렁이를 잡아와 알려준 대로 바늘에 지렁이를 꿰었다.

[의외로군.]

“뭐가 말입니까?”

[지렁이 같은 건 못 잡을 줄 알았다.]

“땅바닥에서도 자는 사람입니다. 못 잡을 리가 없잖습니까.”

정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다시 만난 첫날에 폐가에서 자던 사람이다. 벌레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한다면 하지 못할 행동이었으리라. 근화는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가만 바라보다가 실을 잡고서 정적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걸 이제.]

정적은 강가에 서서 낚시 바늘을 던지는 시늉을 해보였다. 근화는 그 옆으로 가서 똑같이 따라했다. 조금 멀리까지 날아간 바늘은 그대로 강으로 들어갔다. 근화는 실을 느릿하게 감으면서 바늘 쪽에 시선을 집중했다. 어느정도 감았다싶을 때 감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정적을 바라보았다.

[이제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면 된다.]

“그렇습니까.”

잠시 침묵. 먼저 입을 연 것은 정적이었다.

[낚시란 이런 것이다.]

그리고 정적은 자신의 낚시에 대한 신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내용을 가만히 들으며 근화는 정적을 바라보았다. 정적의 얼굴은 묘하게 달라져있었다. 마치 어린 아이 같은, 실타래를 발견한 고양이 같은 얼굴이었다. 즐거워보였다. 처음으로 그의 감정이 읽혀지기 시작했다. 그는 무척이나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근화도 덩달아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감정이란 전염되는 것이라 했던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근화는 웃으면서 그의 말을 들었고, 가벼운 맞장구도 쳐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얘기하던 때, 드디어 실이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근화는 급히 고개를 돌려 바늘 쪽을 바라보았고, 정적도 얘기를 그만두고 어떻게 낚아야 하는지를 말해주었다.

천천히 실을 감았다. 서서히 속도를 올려 실을 감는다. 실 끝에서 묵직한 것이 느껴진다. 근화는 서두르지 않았다. 정적이 알려준 대로 차근차근 물고기를 낚아 올렸다. 손에 실이 파고든다. 꽤 큰 것이었는지 상당한 힘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근화는 실을 놓지 않았다.

“아!”

[오.]

팔에 힘을 실어 강하게 잡아당겼다.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튀어 올라 근화에게로 떨어졌다. 근화는 당황한 표정으로 잉어를 바라보다가 두 손을 뻗어 품에 안았다. 잉어는 크게 몸부림쳤다. 그 길이는 근화의 팔도 넘을 것 같아보였다. 근화는 두 손으로 단단히 잉어를 끌어안고 정적을 바라보았다.

“낚았습니다!”

정적은 그런 근화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근화는 방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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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누군가라네
,

[리퀘] 꽃집

2015. 7. 30.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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