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있어? 그 때, 정말 좋았는데.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항상 달라져있다. 오늘은 수많은 글자들이 눈을 파고들어와 책을 던지게 만들어버렸다. 손으로 눈을 가리며 눈살을 찌푸렸다가 몸을 일으켜 앉아 저 멀리에 떨어져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어제 편집자가 초판이 나왔다며 갖다 준 내가 쓴 책이었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에 다가갔다. 절뚝거리는 다리는 이미 익숙하다.
“이상한 꿈을 꾸게 만들었네.”
책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서 잘 덮어 테이블 위에 얹어두었다. 가만 책의 표지를 바라보았다. 어울리지 않게 희망찬 글이나 쓰고 있으니 그런 꿈을 꾸지. 눈살을 찌푸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집에 틀어박혀서 글만 쓰다간 내가 책이랑 같이 인쇄 될 판이었다. 나가야한다. 일주일이나 집에만 있었다.
“냉장고도 비었군.”
부엌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전에 사다둔 것들이 다 떨어졌다. 확실히 떨어 질만 했다. 일주일,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니지. 고개를 젓고는 냉장고 문을 닫고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몸에서 기운이 빠진다.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었다. 허리 넘어 까지 내려올락 말락 하는 머리카락을 빗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자를 생각은 없었다.
“그나저나.”
다른 고양이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 몇 명은 짐작이 가지만 몇 명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랩실은 오늘도 순찰을 돌고 있겠지? 쿠스토는 가람이랑 같이 있을 것이고. 센은 뭘 하고 있지? 고개를 갸웃하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아아,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거칠거칠한 턱을 깔끔하게 해야 했다.
“흐음.”
깔끔하게 면도된 턱을 쓰다듬으며 거울을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저씨로군. 슬슬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서있었다. 테이블로 가 의자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저리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다가 바지를 걷어 올렸다. 발등부터 무릎까지 이어져있는 커다란 흉터는 내 다리 상태가 예전과 같지 않음을 알려온다. 이런 거,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러고보니 센도 다리가 불편하다고 했던가. 문득 떠올랐다. 바지를 내리고 가만 생각에 잠겼다. 오늘따라 유난히 센이 생각난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 다정한 말투? 목소리? 온화한 표정? 가족이 있다면 이런 가족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가족, 가족이라.
“음-.”
기억나지 않는다. 벌써 삼십년이나 지난 일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으로 가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밖에 나가야했다. 이대로 계속 집에 있다가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귀찮은 생각들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휴식이 필요했다. 예의 그 차림을 하고, 지팡이를 들었다. 수염은 붙이지 않았다.
햇빛은 적당했고, 하늘은 맑았다. 나무는 푸르렀고, 길은 걷기에 좋았다. 이 마을에 오기를 무척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향긋한 풀내음을 맡으며 가만 서 있다가 길을 걸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일주일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이곳은 변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그건 단순히 건물이나 식물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그를 바라보며 웃고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목에 따스하고 부드러워 보이는-솔직히 그것이 그를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복슬복슬한 털을 목에 두르고서 앉아있었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통 밖엘 안나오다보니.”
“글을 쓰셨나요?
“그렇지요.”
가벼운 대화가 오간다. 그가 묻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렇게 몇 번 대화가 오가면 조금씩 말이 줄어들면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는데 그 상태가 어색하다거나 하지는 않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둘 다 말은 없었지만 어색하다거나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음, 어쩌면 가족이 이럴까?
“그대.”
“네?”
남에게 의지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 가족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그건 의지하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 지탱해주는 것일까?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조금은 욕심이 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서로 의지하고, 고민을 털어놓고,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할 수 있는. 솔직히 욕심이었다. 여태까지 그런 것은 꿈도꾸지 않았다. 약해지면 곧 죽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괜찮지 않을까? 조금은 욕심내도 되지 않을까?
“그대의 이름을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대를.
“가족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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