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영웅이잖아!”
그녀가 소리쳤다.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영웅이다. 다른 세계에서 이곳으로 온 여신의 축복을 통해 죽지 않는 존재. 모리안 여신을 구하고, 빛의 기사가 되고서 포워르들의 계획을 막아 에린을 수호한 존재. 드래곤의 감응자이자 그림자 세계로부터 에린을 구한 영웅이자 반신이자 브류나크의 소지자이자 키홀의 힘을 받은 자이자 수 많은 위기로부터 에린을 수호한 영웅. 나는 영웅이다.
“갈게.”
그런 내가 그들을 구하지 않으면 누가 구할 수 있을까? 그런 내가 그들을 위해 싸우지 않으면 누가 그들을 위해 싸워줄까? 그들의 생명은 무한하지 않다. 그들의 생명은 한 번 꺼지면 끝이다. 하지만 나는 밀레시안. 나는 죽지 않는 존재. 몇 번이고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존재. 나의 죽음 한 번으로 다른 이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다.
“나는, 영웅이니까.”
나의 힘을 막는 무언가가 있다고 해도 나는 싸워야만 한다. 나는 영웅이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구하겠어.”
아무도 구할 수 없다. 그 누구도 구할 수 없다. 사실 나는.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공격을 해온다.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많은 병사들이 쓰러져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검을 꺼내들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 내가 구해야만 한다. 한 손에는 가드실린더를 들고, 한 손에는 검을 든 채로 괴물들에게 달려간다. 두 발로 일어선 괴물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는다.
“영웅께서 와주셨어!”
“우린 살았어!”
“힘내세요! 영웅님!”
몸을 회전시키며 박아 넣은 검을 빼며 괴물을 날린다. 날아간 괴물은 곧장 일어나서 나에게로 달려와 앞발을 휘두른다. 급히 가드 실린더로 그 공격을 막고 검으로 몇 번 괴물을 내리쳤다. 느낌이 다르다. 다시 몇 번 더 내리쳤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내리쳤다. 느낌이 다르다. 이것이, 이것이.
“뭔가 이상하지 않아?”
누군가가 말했다.
“왜 괴물이 쓰러지지 않는 거지?”
누군가가 물었다.
“설마, 아닐 거야. 영웅님이잖아!”
누군가가 소리쳤다.
“영웅님이 우리를 구해주실 거야!”
누군가가 절규했다. 나는 구할 수 없다고 직감했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괴물이 앞발을 높게 들었다가 빠르게 내 머리를 내려찍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가 땅에 박히고, 나는 잠시 멀어졌던 의식을 겨우 바로 잡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에게 흥미를 잃은 괴물은 곧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갑옷이 부숴지고, 검이 떨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아무도 구할 수 없다.
“살려주세요!”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영웅인데. 나는, 영웅인데!
“영웅님!”
절규에 가까운 부름이었다. 그 부름을 끝으로 병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병사들이, 투아하 데 다난들이 찢겨져나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간신히 검을 잡아들고 몸을 일으켰다. 후두둑, 몸에서 돌조각들이 떨어진다. 다시 검을 강하게 쥐고서 괴물에게 달려가 등에 검을 꽂았다. 괴물이 뒤돌아본다.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내 몸은 하늘로 떠올랐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으아아악!”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숨이 차오른다. 눈앞이 흐릿해진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아무도 구할 수 없다. 눈물이 흐른다. 뜨겁다. 피 인가?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나는 누구도 구하지 못해. 난, 영웅이 아니야. 나는 여태 아무도 구하지 못했어. 정작 내가 구했어야 하는 이들은 모두 죽었어. 다신 돌아오지 않아.
“밀레시안님!”
아득히 멀어져가는 정신 속에서 빛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아, 알터.
“밀레시안님, 이제 괜찮아요!”
그의 괜찮다는 목소리에 흐릿해졌던 눈앞이 다시 평소대로 돌아온다. 밝은 초록색의 눈동자가 나를 내려보고있다. 그 눈에는 경멸도, 한심함도, 비조도 담겨있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동경의 눈빛으로, 존경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뻗어 알터의 뺨을 쓰다듬다가 꽈악 끌어안았다.
“밀레시안님, 얘기는 이따 하도록 해요.”
팔이 풀리고, 그 아이는 검을 들고서 괴물들에게 달려간다. 아이와 두 기사의 손에 괴물들은 빠르게 쓰려져간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많은 병사들이 죽었다. 이미 많은 병사들이 크게 다쳤다. 그들은 나를, 나를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을 모아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 아무도-.
“으아, 으아아, 아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
병사들을 지키지 못했다. 영웅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괴물에게 당해서 쓰러졌다. 결국 괴물을 쓰러트리는 건 나를 존경하는 아이. 나는 영웅이 아니다. 나는 아무도 지키지 못하는 힘없는 밀레시안일 뿐이다. 그들이 나를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나는.
“밀레시안님!”
배를 뚫은 검의 아픔은 느껴지지만 죽음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차라리 죽고 싶다. 차라리.
“당신은, 당신은 제 영웅이에요!”
아이가 소리친다. 아아, 알터. 차라리 네가 영웅이었고, 차라리 내가 널 존경했더라면 좋았을 탠데. 그 자리에 쓰러지며 알터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그런 표정 짓지마, 알터. 어차피 죽지 않아. 조금만, 아주 조금만 자고 일어나면 금방 다시 회복되어 있을 거야. 아무도 지키지 못하는 영웅은 차라리 잠들어있는 게 나을 태니까.
나는 아무도 지키지 못하는 영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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