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화/정적] 변화

2015. 7. 27. 11:26

일상의 변화는 사소한 듯 사소하지 않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날도 근화는 평소랑 다를 바 없이 크게 선 장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과 섬세한 손짓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그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도록 유인했다. 근화의 삿갓이 묵직해졌을 때쯤에 근화는 춤을 멈추고 사람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삿갓을 챙겨 이만 돌아가려고 했다. 돌아가려고 했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언뜻 보인 익숙한 복장, 이런 환한 대낮에 오히려 더 튀는 사람. 익숙한 얼굴. 하지만 곧 그 사람은 뒤돌아 걸어갔다. 근화는 그 뒤를 따라가며 손을 뻗었다.

“아.”

잡았다 생각했지만 잡히지 않는다. 근화는 멍하니 허공을 가른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들. 근화는 급히 돈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 삿갓을 쓰고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일까? 잘 못 본 거 아닐까? 착각한 거 아닐까? 그 사람은 이미, 그때. 그때 확실히.

[오랜만이다.]

인적이 드문 숲으로 나와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근화의 옆에 불쑥 웬 사람이 튀어나오며 인사를 건넸다. 근화는 놀란 기색도 보이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아,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며 근화는 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다면 잘 지냈다.]

형식적인 인사가 오가고 잠시 말이 없어졌다. 근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분명히 죽었다. 그는 분명히 죽었을 터인데, 심지어 죽은지도 꽤 오래되었다. 지금쯤이면 당연히 저승의 강을 건너 환생을 하든 뭘 하든 했을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떡하니 옆에 와있다. 더군다나 환한 대낮에 장에서 장을 구경하기까지 했다. 근화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군.]

“그럼 그대는 이해가 가십니까?”

귀신이어도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이렇게 떡하니 자신의 앞에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데. 근화는 괜히 가시 돋힌 말투로 톡 쏘아붙이고는 이마를 짚었던 손을 내렸다. 그 사람-정적은 예의 평소 그 표정으로 근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더군다나 저 말. 저 말. 근화는 일단 진정하기로 했다. 자신이 너무 피곤해서-요 근래 날씨가 좋지 않아 얼마 자지도 못했다- 헛것을 보고 듣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눈을 감고 심호흡을 다섯 번 정도 하고 난 뒤에 눈을 떴다. 헛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눈앞에 있었다. 이쯤 되면 인정 할 수밖에 없다.

“왜 구천에서 떠돌고 계십니까?”

저승으로 가지 않았다.

[이곳이 더 편하다.]

어련하시겠습니까. 근화는 갑자기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어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축 늘어졌다. 그래, 귀신 입장에서는 구천이 더 편하다 이 말이지. 그래,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정적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일부러 찾아온 것인가, 아니면 그냥 둘러보다가 마주친 것인가. 후자일 가능성이 더 컸기에 딱히 묻지는 않았다.

[이제 뭘 할 건가?]

그가 물었다. 근화는 가만 정적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일단 지금은 다른 장이 서는 곳을 찾아 갈 생각입니다만 그 전에 할 일이 생겼습니다.”

정적이 일어선 근화를 올려다보다가 일어난다. 일어난다고 해도 되는 것일까? 자세히 보니 다리 쪽이 좀 흐릿한 거 같다. 근화는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다시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오늘 번 돈으로 가벼운 주전부리와 술을 사와 정적을 불러 앉혔다.

“먼 길 오시는 동안 제대로 된 상도 못 받으셨을 태니 한 잔 받으십시오.”

근화는 술을 따르고 세 번 돌린 뒤에 정적의 앞에 내려놓았다. 정적은 근화와 술잔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잔을 들었다. 근화는 가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젓가락으로 전을 들어 정적의 입가에 가져갔다. 원래 주는 것이 아니라 젓가락을 놓는 것이었나 생각하던 사이에 정적이 전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것에 근화는 그냥 고민을 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거나 줄 수 있으면 된 거 아닌가.

“입에 맞으십니까?”

[나쁘지 않다.]

미묘한 대답. 근화는 가만 정적을 바라보다가 정적의 잔에 술을 따라 주고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몇 번 손이 오가고보니 사온 것들은 금방 동이 났다. 근화는 병이랑 잔을 챙기고 가만 정적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살아있지 않은 자와 눈이 마주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별 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어쩌면 익숙해져서 안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뭘 하실 것입니까?”

근화가 물었다.

[딱히 생각 해 둔 건 없다.]

정적이 대답했다. 그렇겠지. 귀신이 무얼 할까. 근화는 자신의 질문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고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틀린 질문도 아니었으니 딱히 상관은 없으리라. 정적은 가만 근화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근화의 어깨를 톡 두드렸다. 그 사소한 행동에 어깨가 무거워지고 한기를 느낀 근화는 급히 뒤로 물러나다 넘어졌다.

[괜찮나?]

괜찮을 리가. 근화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정적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역시 귀신은 귀신이었다. 근화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가만 정적을 바라보았다. 얼굴만 보면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데. 죽을 당시 났었던 상처도 없어진 것 같다.

“저승으로 안 가십니까?”

근화가 물었다. 정적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적의 뒤쪽에서 가벼운 바람이 불어왔다. 근화는 그 바람에서 한기를 느끼고는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다.

[괜찮다면.]

정적이 입을 열었다.

[같이 가도 되겠나?]

근화는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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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누군가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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