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되새겨도 그 시절이 돌아오진 않지만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기에 추억인 게 아닐까?

오랜만이다. 그리덤프는 상공을 날아다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하나지방이었다. 몇 달만이지? 고개를 갸웃하면서 생각하다가 그리덤프는 일단 아래로 내려갔다. 이 근처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덤프는 곧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발견했다.

그리덤프는 나무열매를 따다가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머니도 그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덤프는 가만히 앉아서 무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바라본들 여기서 눈물을 흘린들 트레이너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이러고 있고 싶다. 그리덤프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리덤프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읽을 수 없는 바람이 불어올 때였다. 읽을 수 없는 바람이지만 익숙한 바람이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때에 느꼈었던 바람. 그리덤프는 곧장 날개를 펴서 날아올랐다. 높게, 더 높게 날아올랐다. 그리고 초록빛이 보였을 때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레쿠!”

그리고 소리쳤다.

“그리덤프?”

오랜만에 만난 친구였다. 그리덤프는 레쿠를 올려다보았다. 레쿠는 곧 아래쪽으로 내려와 그리덤프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그리덤프는 그런 레쿠를 바라보다가 따라 웃었다. 무척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였다. 거처를 신오지방으로 옮긴 뒤부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애초에 레쿠에게 거처가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레쿠쟈다. 레쿠쟈는 오존층을 날아다닌다. 그리덤프는 보지도 가지도 못 할 곳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레쿠가 물었다. 그리덤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휘청였다. 이 이상으로 날고 있는 것은 위험했다. 난기류의 원인인 레쿠는 멀쩡한 것 같았지만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그리덤프에겐 이렇게 공중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아래에 주머니에 나무열매를 말려놓은 것을 담아왔다.

“차 마실래?”

좋아. 레쿠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같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덤프는 가볍게 착지하고서 주머니를 들어올렸다. 그러곤 가만 무덤을 바라보다 레쿠를 바라보았다.

“여긴 무덤이니까, 저쪽으로 가자.”

그리덤프는 앞장 서 걸어갔다. 아래로 내려온 레쿠는 흘끔 무덤을 한 번 보고서 그리덤프를 따라 걸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차를 먹기에 적당한 장소가 나타났다. 그리덤프는 그곳의 풀을 베어버리고 자신이 가져온 가방에서 찻주전자와 찻잔을 꺼냈다.

“가지고 다니는 거야?”

“네오가 챙겨줬어.”

깨진 곳이 없나 살펴보던 그리덤프는 근처에서 나뭇가지들을 꺾어와 넝쿨로 잘 엮어 그럴듯한 대를 만들었다. 레쿠는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다가 나뭇가지들을 모아와 찻주전자 아래에 잘 쌓아놓았다. 그 사이에 그리덤프는 근처 강가로 가 주전자에 물을 담아 걸어두고, 가방 가장 안쪽에 잘 싸여있던 부싯돌을 꺼내들어 나뭇가지에 불을 붙였다.

“그것도 네오가 챙겨 준거야?”

“응.”

물이 끓기를 기다린다. 불이 소리를 내며 타오른다. 그리덤프와 레쿠는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그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눴다. 어떻게 지냈는지부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까지. 예전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예전, 그곳에 있었을 때도 꽤 많은 얘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그렇게 친구가 되었지만 그곳을 나온 뒤부턴 얼마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건 그저 추억. 가끔씩 꺼내보면 그땐 그랬지 하게 되는 기억.

“물 끓는다.”

그저 그렇게 남게 되는 기억일 뿐이었다.

“잘 마실게.”

친구라는 건 지금도 변하지 않으니까.

“응.”

가끔 이렇게 만나 추억을 꺼내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시태그]  (0) 2015.08.18
[앵연] 다시 만나고싶거든  (0) 2015.08.17
[근화/앵연] 눈  (0) 2015.08.13
[노자키군/카시호리(?)] 주말  (0) 2015.08.03
[GNe] 배움  (0) 2015.08.03
Posted by 누군가라네
,

[해시태그]

2015. 8. 18. 18:54
해시태그
첫번째로 멘션 온 캐릭터를 두번째로 멘션 온 캐릭터가 죽인다.

-*

이건 뭘까? 눈을 뜨니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분명 눈은 뜨여져있는데, 앞도 보이는데. 마치 꿈 속을 부유하고 다니는 것만 같다. 사실 눈도 보이기는 하지만 흐릿해. 어떻게 된걸까? 어째서? 왜? 그보다 지금 계속 풍경이 바뀌고있다. 몸이 움직이고있다.

아.
갑자기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온다. 이건 뭐였지? 어떤 거였지? 움직이던 몸이 멈춰섰다. 두 손을 들어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그저 숲만 가득 할 뿐이다. 풀들만 무성 할 뿐이다. 숨을 깊게 들이마쉬고 길게 내쉰다.

아아. 기억났다.
분노였다. 분노였다. 아주 오래 전에 한 번, 아니 몇 번이고 느껴본 적 있었던 이 감정. 동족에게 무시당하고, 다른 포켓몬에게 치이고, 거대 코뿌리에게 찔렸을 때 느꼈던 감정. 왜 이 감정이 갑자기 솟구쳐 올라오는 것일까?

아. 진화다.
진화였다. 손톱이 날카롭게 자라나 있었다. 머리카락도 전보다 훨씬 더 길어졌다. 몸도 상당히 무거워졌다. 이것은 분명 진화였다. 내가 갸라도스로 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진화의 부작용같은 것인가? 이 분노는, 끓어오르는 분노는-.

이런. 두리안이다.
여태 한 명도 보이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나무를 부숴서 분노를 가라앉히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무가 아니라 강으로 돌아가 강으로 들어가면 될 거 같았으니까. 근데, 무리. 무리다. 포켓몬을 보자 참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피해! 피하라고!
속으로 소리쳤다. 속으로 계속 소리쳤다. 두리안의 놀란 표정, 박혀 들어가는 손톱, 끓어오르는 분노. 단단한 손톱은 부러지는 것도 없이 두리안의 배로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그것만이었으면 좋으련만. 손을 뽑아내고 반대 손으로 두리안의 목을 잡아 던졌다. 손가락이, 화상을 입을 거 같아.

"살인미수야-."

이 상황에서도 실없는 농담. 두리안은 안경을 꺼내 쓰고는 두 손을 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두리안의 목을 잡아 들어올렸다. 아까 내가 찌른 부위를 중심으로 붉게 변해간다. 멍하니 그 부위를 바라보다가 두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두리안의 눈에 드러난 감정. 난, 나는.

"그만."

나도, 멈추고싶었다.
비가 내린다. 차가운 비가 내린다. 온몸이 젖어간다. 변해간다. 손은 지느러미가 되고, 다리는 꼬리가 되고, 입은 벌어지며 이빨은 커진다. 감출 수 없는 분노는 붉은 색이 되어 나타나고, 지느러미에 묻은 피도 씻겨져 내려간다.

차갑게 식고있는 두리안을 바라보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분노가 식지 않는다. 분노가 식지 않는다.

나는-.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상] 레쿠군과 티타임(?)  (2) 2015.08.23
[앵연] 다시 만나고싶거든  (0) 2015.08.17
[근화/앵연] 눈  (0) 2015.08.13
[노자키군/카시호리(?)] 주말  (0) 2015.08.03
[GNe] 배움  (0) 2015.08.03
Posted by 누군가라네
,
내기는 끝났다.

남은 것은 없었다.
가만 손에서 구슬을 굴려보았다. 데구르르, 데구르르. 소리도 없이 잘도 굴러간다. 이 구슬은 방금 전까지만해도 자신이 깨져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질 뻔했음을 알고 있을까? 모르겠지. 모르겠지. 이 구슬이 무슨 생각이 있다고.

남은 것이 없었다.
가만 구슬을 바라보았다. 구슬 속에 피어있는 꽃은 여전히 시들기미도 보이지 않고 활짝 피어있었다. 내가 죽을 때 이 꽃도 시들까?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내 손은 비어있었다. 빈 손을 바라보다 탁탁 털었다.

정말 없는 걸까?
모래 위에 섰다. 발자국이 남았다. 모래가 버선에 묻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카락과 옷이 흩날린다. 뒤돌아 내기를 하던 섬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았다.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훑어온다. 다시 눈을 떴다. 다시 뒤돌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떠날 시간이다.

없다고 믿고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발걸음을 옮긴다. 모래 위에 남은 흔적은 지워지리라. 발에 붙은 추억과 미련은 언젠간 떨어지리라. 몸을 훑은 바람은 다른 바람에의해 잊혀지리라. 그리하면 남은 것은 없으리라. 이 섬에 남기고 가는 것도, 이 섬에서 가지고 나가는 것도 없으리라.

미련이 남았음을 인정하기 싫었다. 추억을 얻었음을 인정하기 싫었다. 유희가 더이상 유희가 아니게 되었음을 깨닫고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이 섬에 두고 떠나 다시 전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 다니고싶었다. 이곳을 잊어버리고싶었다.

그럴 수 없을 거 같다.

만약 나에게 연락하고싶은 구미가 있거든 새를 한 마리 날려보내주오. 그 새의 입에 벚꽃을 물려 하늘높이 날려보내주오. 그렇다면 내 그 새를 보고 다른 새에게 편지를 쥐어 날려보내리다. 아니면 강에 벚꽃잎을 띄어 보내고 그곳에서 기다리십시오. 내 그 꽃잎을 보고 사슴에게 편지를 묶어 강 위로 보내오리다.

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나겠지요.


혹여나
나를 다시 만나고싶거든 까마귀에게 벚꽃을 물리고, 까마귀 다리에 편지를 묶어 하늘로 날려보내주십시오. 내 편지에 적힌 곳으로 반드시 찾아가리다.

나의 미련과
나의 추억과
나의 어리석음과
나의 감정을

나는 이 섬에 모두 버리고 떠나오겠사옵니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상] 레쿠군과 티타임(?)  (2) 2015.08.23
[해시태그]  (0) 2015.08.18
[근화/앵연] 눈  (0) 2015.08.13
[노자키군/카시호리(?)] 주말  (0) 2015.08.03
[GNe] 배움  (0) 2015.08.03
Posted by 누군가라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