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고 변화 할 것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
[너는]
오랜만에 큰 길을 걷는다. 근 삼일 가량을 산에서 살다시피 했더니 사람들이 많은 길이 낯설었다. 앞서서 걸어가던 근화는 정적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며 걸어갔다. 길 한복판에 갑자기 멈춰 서서 뒤를 보는 것만큼 이상한 행동도 없을 태니까. 정적도 그러하단 걸 알고 있는지 그 행동에 대해 별 말 하지 않고 근화를 따라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여인과 연을 쌓을 생각이 없는가?]
근화는 휙 몸을 돌려 정적을 바라보았다. 정적은 예의 그 표정으로 근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근화는 잠시 진정하면서 할 말을 골랐다. 딱히 화낼 만한 물음도 아니거니와 별 달리 신경 쓸 만한 말도 아닌데 이상하게 신경 쓰인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근화는 그냥 생각하기를 관두기로 했다. 고개를 젓고는 다시 뒤돌아 걸어간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걸어가면서 근화가 뱉은 한 마디였다. 정적은 고개만 가볍게 까딱이며 뒤를 따라갔다. 평범한 마을이었다. 장이 서지 않았기에 오래 머물 필요는 없는 곳. 작은 마을인지라 금방 한 바퀴를 둘러볼 수 있었다. 근화는 마을 입구 근처 나무 아래에 앉아서 정적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가?]
아까 전 그 물음을 한 이유가 궁금했다. 짐작이 가지만. 딱히 깊은 생각을 하고서 내뱉은 물음은 아니었을 거다. 자신이 그러하듯이 그도 가끔씩 별 의미 없는 질문, 별 의미 없는 말, 딱히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것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물음을 내뱉으니까.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깊게 생각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근화는 고개를 저으며 말하고선 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보니 이 나무-. 근화는 멍하니 나무를 올려다보다 옆에 앉아있는 정적을 바라보았다. 일단 그가 악귀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만약 그가 악귀였다면 이 나무를 지나서 자신과 함께 마을로 들어가는 것은 무리였을 태지. 새삼스럽지만 근화는 안심이 되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재밌는 생각이라도 났는가?]
근화가 웃었다. 정적이 물었다.
“아니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을 뿐이옵니다.”
근화가 대답했다. 정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슬슬 자리를 옮겨야 할 때가 될 때까지 그대로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구름은 흘러가고, 하늘은 붉게 물들어간다. 해는 자신의 잠자리로 옮겨가고, 나뭇잎들은 바람과 재미나게 노는듯 몸을 흔든다. 정적은 말이 없었고, 근화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아아!”
슬슬 일어날까 생각하고 있었던 때에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화는 들었던 고개를 숙여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정적도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잔뜩 화가 난 얼굴을 하고서 근화에게 다가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근화는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소녀를 바라보기만 할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근화를 바라보던 정적은 목 울리는 소리를 내더니 근화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닥였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근화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죄송합니다. 오랜 여정에 다리가 아파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근화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소녀는 그런 근화를 가만 바라보다가 허리에 손을 올리더니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서 허리를 빳빳이 세운다. 소녀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계속 화를 낸다면 분명 자신만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겠지. 소녀는 이만 근화를 결정을 내리고 눈을 떴다.
“다음부턴 여기서 쉬지 말아주십시오! 이 나무는 마을을 지켜주시는 수호신의 집이옵니다!”
소녀가 소리쳤다. 근화는 꾸벅 한 번 더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소녀는 꽈악 주먹을 쥐었다. 저리 예의바르게 나오면 오히려 자신 쪽에서 기분이 묘해진다. 괜한 사람을 잡고 있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소녀는 심호흡을 몇 번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근화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제 괜찮다는 의미였다. 근화는 소녀의 손길에 고개만 살짝 들었다. 그리고 그런 근화의 귀에 정적이 또 무어라 속닥였다.
“아 좀 그만 하십시오!”
그리고 근화는 큰 소리를 내버리고 말았다. 소녀는 놀랐고, 정적은 재밌어했다. 근화는 당황했다. 소녀는 자신의 호의를 거절당했다 생각했고, 정적은 참 재밌는 반응이라 생각했으며 근화는 머릿속이 새하얘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근화는 최대한 빠르게 정신을 되돌리고, 어찌 할지를 정했다.
“죄송합니다. 그대에게 한 말이 아니었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대,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평소와는 다르게 빠르게 말을 뱉어내고 근화는 급히 뒤돌아 뛰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적은 소녀를 한 번 보았다가 근화를 따라갔다. 멍하니 혼자 남겨진 소녀는 눈만 끔뻑이다가 정신을 차리고서 크게 소리쳤다. 다음번에 보면 가만두지 않겠노라고.
“다 정적 때문이잖습니까!”
마을에서 멀어져 숲으로 들어왔을 때 근화는 뒤돌아 정적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정적은 자신은 아무 짓도 안했다는 듯 예의 평소 그 표정을 지으며 근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화는 더 이상 말 할 가치를 못 느꼈다. 도발에 넘어간 것은 자신이었다.
[여인과 대화 해 본 소감은?]
그리고 저렇게 태평하게 저런 질문을 건네오니 딱히 반박 할 생각도 안 드는 것이다. 근화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근처 적당한 나무 아래에 자리 잡고 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감정에 큰 동요가 온 것이 얼마만인지. 이것은 분명 그와 함께 하고 난 뒤에 생긴 변화였다. 그가 밉상일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같이 다니는 것이 나쁘진 않다는 뜻인 거겠지.
“그대는.”
근화는 고개를 들어 정적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언제까지 저와 함께 다닐 것이옵니까?”
혼자 길을 거니는 것은 외롭다. 수많은 사람이 스쳐지나가지만 그 사람 중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춤을 봐주는 사람 중에서 돈을 주는 이는 많아도 자신을 봐주는 이는 없다.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롭다. 혼자 길을 거니는 것은 가끔 울 것 같은 마음이 될 정도로 외롭다.
하지만 그와 함께 하고 나서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으면 즐거웠지 슬퍼지지는 않았다. 그가 인간이 아니긴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같이 다닌다는 것이 좋았다.
[나는.]
정적은 근화를 바라보았다. 보기 드문 감정 변화들이었다. 정적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공중에서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근화는 그런 정적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정적의 손을 쥐어보았다.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근화는 그 상태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정적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실언이었습니다. 이만 자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적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근화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정적은 그런 근화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화는 대답을 듣지 않았다. 일부러 피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적은 딱히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그다지 대답 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근화도 대답을 원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답이 두려웠다.
[잘자라.]
숲의 밤은 무섭고도 아름답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산짐승들이 움직이는 소리도 들려온다. 나뭇잎과 별들이 한 대 어우러져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내고, 달빛이 길을 밝혀주며 그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러한 숲에서 근화는 잠이 들었고, 정적은 근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해가 밝아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근화는 가벼운 몸으로 일어났다. 정적도 근화를 따라 일어났다. 근화는 가볍게 몸을 풀고는 정적을 바라보았다. 기분은 다시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근화는 평소처럼 웃었다. 그리고 손짓했다. 해는 밝았고, 하늘엔 구름이 없었다. 나뭇잎들은 바람과 노느라 자신의 몸이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 멋들어진 아침 풍경이었다.
“또 며칠 동안 걸어야합니다.”
근화가 입을 열었다.
“낚시터는 이번 달 말에 가도록 하지요.”
정적은 근화와 함께 걸었다.
[좋다. 기대되는군. 이번에도 대어를 낚았으면 좋겠다.]
정적이 말했다.
숲길을 걸어간다. 숲길에 남는 발자국은 하나. 그러나 그곳에 남은 추억은 두 명의 몫이었다.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자키군/카시호리(?)] 주말 (0) | 2015.08.03 |
---|---|
[GNe] 배움 (0) | 2015.08.03 |
[뮬릿] 이름을 부른다는 것 (0) | 2015.07.31 |
[근화/정적] 낚시 (0) | 2015.07.31 |
[리퀘] 꽃집 (0) | 2015.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