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화/정적] 감정

2015. 8. 3. 13:25

언제까지고 변화 할 것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

 

[너는]

오랜만에 큰 길을 걷는다. 근 삼일 가량을 산에서 살다시피 했더니 사람들이 많은 길이 낯설었다. 앞서서 걸어가던 근화는 정적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며 걸어갔다. 길 한복판에 갑자기 멈춰 서서 뒤를 보는 것만큼 이상한 행동도 없을 태니까. 정적도 그러하단 걸 알고 있는지 그 행동에 대해 별 말 하지 않고 근화를 따라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여인과 연을 쌓을 생각이 없는가?]

근화는 휙 몸을 돌려 정적을 바라보았다. 정적은 예의 그 표정으로 근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근화는 잠시 진정하면서 할 말을 골랐다. 딱히 화낼 만한 물음도 아니거니와 별 달리 신경 쓸 만한 말도 아닌데 이상하게 신경 쓰인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근화는 그냥 생각하기를 관두기로 했다. 고개를 젓고는 다시 뒤돌아 걸어간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걸어가면서 근화가 뱉은 한 마디였다. 정적은 고개만 가볍게 까딱이며 뒤를 따라갔다. 평범한 마을이었다. 장이 서지 않았기에 오래 머물 필요는 없는 곳. 작은 마을인지라 금방 한 바퀴를 둘러볼 수 있었다. 근화는 마을 입구 근처 나무 아래에 앉아서 정적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가?]

아까 전 그 물음을 한 이유가 궁금했다. 짐작이 가지만. 딱히 깊은 생각을 하고서 내뱉은 물음은 아니었을 거다. 자신이 그러하듯이 그도 가끔씩 별 의미 없는 질문, 별 의미 없는 말, 딱히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것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물음을 내뱉으니까.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깊게 생각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근화는 고개를 저으며 말하고선 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보니 이 나무-. 근화는 멍하니 나무를 올려다보다 옆에 앉아있는 정적을 바라보았다. 일단 그가 악귀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만약 그가 악귀였다면 이 나무를 지나서 자신과 함께 마을로 들어가는 것은 무리였을 태지. 새삼스럽지만 근화는 안심이 되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재밌는 생각이라도 났는가?]

근화가 웃었다. 정적이 물었다.

“아니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을 뿐이옵니다.”

근화가 대답했다. 정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슬슬 자리를 옮겨야 할 때가 될 때까지 그대로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구름은 흘러가고, 하늘은 붉게 물들어간다. 해는 자신의 잠자리로 옮겨가고, 나뭇잎들은 바람과 재미나게 노는듯 몸을 흔든다. 정적은 말이 없었고, 근화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아아!”

슬슬 일어날까 생각하고 있었던 때에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화는 들었던 고개를 숙여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정적도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잔뜩 화가 난 얼굴을 하고서 근화에게 다가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근화는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소녀를 바라보기만 할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근화를 바라보던 정적은 목 울리는 소리를 내더니 근화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닥였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근화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죄송합니다. 오랜 여정에 다리가 아파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근화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소녀는 그런 근화를 가만 바라보다가 허리에 손을 올리더니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서 허리를 빳빳이 세운다. 소녀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계속 화를 낸다면 분명 자신만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겠지. 소녀는 이만 근화를 결정을 내리고 눈을 떴다.

“다음부턴 여기서 쉬지 말아주십시오! 이 나무는 마을을 지켜주시는 수호신의 집이옵니다!”

소녀가 소리쳤다. 근화는 꾸벅 한 번 더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소녀는 꽈악 주먹을 쥐었다. 저리 예의바르게 나오면 오히려 자신 쪽에서 기분이 묘해진다. 괜한 사람을 잡고 있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소녀는 심호흡을 몇 번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근화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제 괜찮다는 의미였다. 근화는 소녀의 손길에 고개만 살짝 들었다. 그리고 그런 근화의 귀에 정적이 또 무어라 속닥였다.

“아 좀 그만 하십시오!”

그리고 근화는 큰 소리를 내버리고 말았다. 소녀는 놀랐고, 정적은 재밌어했다. 근화는 당황했다. 소녀는 자신의 호의를 거절당했다 생각했고, 정적은 참 재밌는 반응이라 생각했으며 근화는 머릿속이 새하얘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근화는 최대한 빠르게 정신을 되돌리고, 어찌 할지를 정했다.

“죄송합니다. 그대에게 한 말이 아니었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대,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평소와는 다르게 빠르게 말을 뱉어내고 근화는 급히 뒤돌아 뛰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적은 소녀를 한 번 보았다가 근화를 따라갔다. 멍하니 혼자 남겨진 소녀는 눈만 끔뻑이다가 정신을 차리고서 크게 소리쳤다. 다음번에 보면 가만두지 않겠노라고.

 

“다 정적 때문이잖습니까!”

마을에서 멀어져 숲으로 들어왔을 때 근화는 뒤돌아 정적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정적은 자신은 아무 짓도 안했다는 듯 예의 평소 그 표정을 지으며 근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화는 더 이상 말 할 가치를 못 느꼈다. 도발에 넘어간 것은 자신이었다.

[여인과 대화 해 본 소감은?]

그리고 저렇게 태평하게 저런 질문을 건네오니 딱히 반박 할 생각도 안 드는 것이다. 근화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근처 적당한 나무 아래에 자리 잡고 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감정에 큰 동요가 온 것이 얼마만인지. 이것은 분명 그와 함께 하고 난 뒤에 생긴 변화였다. 그가 밉상일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같이 다니는 것이 나쁘진 않다는 뜻인 거겠지.

“그대는.”

근화는 고개를 들어 정적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언제까지 저와 함께 다닐 것이옵니까?”

혼자 길을 거니는 것은 외롭다. 수많은 사람이 스쳐지나가지만 그 사람 중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춤을 봐주는 사람 중에서 돈을 주는 이는 많아도 자신을 봐주는 이는 없다.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롭다. 혼자 길을 거니는 것은 가끔 울 것 같은 마음이 될 정도로 외롭다.

하지만 그와 함께 하고 나서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으면 즐거웠지 슬퍼지지는 않았다. 그가 인간이 아니긴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같이 다닌다는 것이 좋았다.

[나는.]

정적은 근화를 바라보았다. 보기 드문 감정 변화들이었다. 정적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공중에서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근화는 그런 정적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정적의 손을 쥐어보았다.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근화는 그 상태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정적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실언이었습니다. 이만 자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적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근화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정적은 그런 근화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화는 대답을 듣지 않았다. 일부러 피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적은 딱히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그다지 대답 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근화도 대답을 원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답이 두려웠다.

[잘자라.]

숲의 밤은 무섭고도 아름답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산짐승들이 움직이는 소리도 들려온다. 나뭇잎과 별들이 한 대 어우러져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내고, 달빛이 길을 밝혀주며 그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러한 숲에서 근화는 잠이 들었고, 정적은 근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해가 밝아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근화는 가벼운 몸으로 일어났다. 정적도 근화를 따라 일어났다. 근화는 가볍게 몸을 풀고는 정적을 바라보았다. 기분은 다시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근화는 평소처럼 웃었다. 그리고 손짓했다. 해는 밝았고, 하늘엔 구름이 없었다. 나뭇잎들은 바람과 노느라 자신의 몸이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 멋들어진 아침 풍경이었다.

“또 며칠 동안 걸어야합니다.”

근화가 입을 열었다.

“낚시터는 이번 달 말에 가도록 하지요.”

정적은 근화와 함께 걸었다.

[좋다. 기대되는군. 이번에도 대어를 낚았으면 좋겠다.]

정적이 말했다.

숲길을 걸어간다. 숲길에 남는 발자국은 하나. 그러나 그곳에 남은 추억은 두 명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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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있어? 그 때, 정말 좋았는데.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항상 달라져있다. 오늘은 수많은 글자들이 눈을 파고들어와 책을 던지게 만들어버렸다. 손으로 눈을 가리며 눈살을 찌푸렸다가 몸을 일으켜 앉아 저 멀리에 떨어져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어제 편집자가 초판이 나왔다며 갖다 준 내가 쓴 책이었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에 다가갔다. 절뚝거리는 다리는 이미 익숙하다.

“이상한 꿈을 꾸게 만들었네.”

책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서 잘 덮어 테이블 위에 얹어두었다. 가만 책의 표지를 바라보았다. 어울리지 않게 희망찬 글이나 쓰고 있으니 그런 꿈을 꾸지. 눈살을 찌푸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집에 틀어박혀서 글만 쓰다간 내가 책이랑 같이 인쇄 될 판이었다. 나가야한다. 일주일이나 집에만 있었다.

“냉장고도 비었군.”

부엌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전에 사다둔 것들이 다 떨어졌다. 확실히 떨어 질만 했다. 일주일,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니지. 고개를 젓고는 냉장고 문을 닫고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몸에서 기운이 빠진다.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었다. 허리 넘어 까지 내려올락 말락 하는 머리카락을 빗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자를 생각은 없었다.

“그나저나.”

다른 고양이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 몇 명은 짐작이 가지만 몇 명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랩실은 오늘도 순찰을 돌고 있겠지? 쿠스토는 가람이랑 같이 있을 것이고. 센은 뭘 하고 있지? 고개를 갸웃하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아아,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거칠거칠한 턱을 깔끔하게 해야 했다.

“흐음.”

깔끔하게 면도된 턱을 쓰다듬으며 거울을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저씨로군. 슬슬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서있었다. 테이블로 가 의자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저리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다가 바지를 걷어 올렸다. 발등부터 무릎까지 이어져있는 커다란 흉터는 내 다리 상태가 예전과 같지 않음을 알려온다. 이런 거,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러고보니 센도 다리가 불편하다고 했던가. 문득 떠올랐다. 바지를 내리고 가만 생각에 잠겼다. 오늘따라 유난히 센이 생각난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 다정한 말투? 목소리? 온화한 표정? 가족이 있다면 이런 가족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가족, 가족이라.

“음-.”

기억나지 않는다. 벌써 삼십년이나 지난 일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으로 가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밖에 나가야했다. 이대로 계속 집에 있다가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귀찮은 생각들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휴식이 필요했다. 예의 그 차림을 하고, 지팡이를 들었다. 수염은 붙이지 않았다.

햇빛은 적당했고, 하늘은 맑았다. 나무는 푸르렀고, 길은 걷기에 좋았다. 이 마을에 오기를 무척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향긋한 풀내음을 맡으며 가만 서 있다가 길을 걸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일주일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이곳은 변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그건 단순히 건물이나 식물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그를 바라보며 웃고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목에 따스하고 부드러워 보이는-솔직히 그것이 그를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복슬복슬한 털을 목에 두르고서 앉아있었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통 밖엘 안나오다보니.”

“글을 쓰셨나요?

“그렇지요.”

가벼운 대화가 오간다. 그가 묻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렇게 몇 번 대화가 오가면 조금씩 말이 줄어들면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는데 그 상태가 어색하다거나 하지는 않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둘 다 말은 없었지만 어색하다거나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음, 어쩌면 가족이 이럴까?

“그대.”

“네?”

남에게 의지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 가족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그건 의지하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 지탱해주는 것일까?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조금은 욕심이 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서로 의지하고, 고민을 털어놓고,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할 수 있는. 솔직히 욕심이었다. 여태까지 그런 것은 꿈도꾸지 않았다. 약해지면 곧 죽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괜찮지 않을까? 조금은 욕심내도 되지 않을까?

“그대의 이름을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대를.

“가족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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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화/정적] 낚시

2015. 7. 31. 13:22

한 번 변화가 시작되면 그 변화는 수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그것이 자신이 모르는 것이라도.

“그런데 말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화는 고개를 돌려서 정적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똑같은 표정이다. 어찌 보면 무섭고, 어찌 보면 친근하다. 저 얼굴 안에 숨겨져 있을 수많은 감정들 또는 텅 비어있을 감정들이 궁금해진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 가장 의문이고, 가장 궁금한 것은.

“어떻게 해가 저 중천에 떠있는 대낮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실 수 있는 겁니까?”

처음 만났던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평범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정신이다. 보통 알려진 바로는 그러한 정신은 육체를 벗어나면 밤에 움직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도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알려진 지식들이 무색 할 정도로 잘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싫은가?]

싫진 않았다. 오히려 편리하다면 편리했다. 만약 그가 밤에만 움직일 수 있다면 그와 함께 다니기 위해선 위험한 밤에 걸어 다녀야 하니까. 그는 정신이지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 그는 허리에 찬 칼을 뽑을 수가 없다.

“오히려 다행입니다.”

근화는 대답했다. 밤에만 움직일 수 있었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근처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봤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강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적당한 낚시터가 있다고 합니다. 근화는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적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서 아주 조금, 기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근화는 괜시리 뿌듯해지는 것을 느끼며 작게 웃곤 길을 걸어갔다.

사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었다. 일반 사람도 아니고 귀신을, 그것도 죽은 모습까지 보았던 귀신을 다시 만나 길을 함께 한다는 게 평범하진 않으니까. 하지만 받아들이고, 그때 나누지 못했던 얘기를 나누며 며칠을 지내다보니 이것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공허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앞에 돌이 있다.]

“아.”

생각에 너무 깊게 잠겨있었다. 근화는 꾸벅 감사인사를 하고서 앞을 보고 걸어갔다. 좋은 게 좋은 거다. 깊게 생각 할 필요는 없다.

물이 흐른다. 맑은 물이었지만 얕은 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빨래를 하는 여인이나 물장구치며 노는 아이들이 제법 보였다. 근화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강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이 아래로 내려가면 적당한 낚시터가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낚싯대는 어떻게 합니까?”

[아까 실과 낚시 바늘을 사지 않았는가?]

사긴 했지만. 주머니에서 가느다란 실을 꺼내들었다. 요 며칠은 벌이가 풍족해서 여유 있게 살 수 있었다. 단지, 이걸 사고서 돈이 거의 다 떨어졌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그래서 낚싯대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하는 건 물론이고, 낚싯대로 만들기 적당하게 다듬어진 나무조차 구하지 못했다.

[굳이 나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자신감 있게 말하곤 계시지만. 낚는 것은 정적이 아니라 근화였다. 그리고 근화는 물속에 들어가서 직접 잡아본 적은 있어도 낚싯대를 이용해 잡아 본 적은 없었다. 갑자기 걱정되기 시작했다.

[요령만 익히면 된다.]

내가 알려줄 태니 걱정마라. 묘하게 자신감에 찬 목소리였다. 근화는 정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정적을 못 믿어서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걱정을 떨쳐내려고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다. 다행히 정적은 별 신경을 안 쓰는 듯 했지만 근화는 자신이 잘못 행동한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어 괜히 정적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여긴가?]

“여기 인 것 같습니다.”

강의 아래쪽에는 넓은 원모양으로 물이 고여 있었다. 아마 일시적으로 물을 가둬놓도록 만든 곳인 모양이었다. 저 멀리 아래쪽에는 물을 막고 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이렇게 지으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만 생각하던 근화는 주머니에서 실과 낚시 바늘을 꺼내들었다.

[여기 적당한 나뭇가지가 있다.]

근처 나무 아래에서 정적이 소리쳤다. 낚시 바늘에 실을 꿰고 있던 근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걸어갔다. 정적은 손으로 적당한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두께가 어느 정도 있어서 튼튼해 보이는 나뭇가지긴 했다. 단지, 근화의 키보다 좀 더 높은 곳에 붙어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안 닿나?]

“그대는 조금만 올라가면 닿겠습니다.”

정적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근화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근화는 바늘과 실을 내려놓고서 나무에 매달렸다. 몇 번 미끄러지다가 간신히 위로 올라가 정적이 가리킨 나뭇가지에 손을 뻗었다. 조금만 더 하면 닿을 것 같았다.

“아.”

닿았다. 꺾었다. 그리고 떨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잠시 흐릿해졌다가 돌아왔다. 근화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괜찮은가?]

정적은 손은 대지 못하고 그저 손을 든 채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전에 자신이 기겁하면서 넘어졌던 것 때문인가 생각하며 근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쓰기 적당한 나뭇가지를 얻었으니 된 것이다. 뼈가 부러진다거나 한 것도 없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고 실을 들어 나뭇가지에 묶었다.

[내가 괜히 무리한 말을 한 것 같다.]

“무리라면 도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보다 미끼 꿰는 법이나 알려주십시오. 근화는 낚시 바늘을 흔들며 정적에게 말했다. 정적은 고개를 끄덕이곤 손 모양과 말로 미끼를 어떻게 꿰는지 설명해주었다. 근화는 가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근처 땅을 파 지렁이를 잡아와 알려준 대로 바늘에 지렁이를 꿰었다.

[의외로군.]

“뭐가 말입니까?”

[지렁이 같은 건 못 잡을 줄 알았다.]

“땅바닥에서도 자는 사람입니다. 못 잡을 리가 없잖습니까.”

정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다시 만난 첫날에 폐가에서 자던 사람이다. 벌레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한다면 하지 못할 행동이었으리라. 근화는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가만 바라보다가 실을 잡고서 정적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걸 이제.]

정적은 강가에 서서 낚시 바늘을 던지는 시늉을 해보였다. 근화는 그 옆으로 가서 똑같이 따라했다. 조금 멀리까지 날아간 바늘은 그대로 강으로 들어갔다. 근화는 실을 느릿하게 감으면서 바늘 쪽에 시선을 집중했다. 어느정도 감았다싶을 때 감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정적을 바라보았다.

[이제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면 된다.]

“그렇습니까.”

잠시 침묵. 먼저 입을 연 것은 정적이었다.

[낚시란 이런 것이다.]

그리고 정적은 자신의 낚시에 대한 신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내용을 가만히 들으며 근화는 정적을 바라보았다. 정적의 얼굴은 묘하게 달라져있었다. 마치 어린 아이 같은, 실타래를 발견한 고양이 같은 얼굴이었다. 즐거워보였다. 처음으로 그의 감정이 읽혀지기 시작했다. 그는 무척이나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근화도 덩달아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감정이란 전염되는 것이라 했던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근화는 웃으면서 그의 말을 들었고, 가벼운 맞장구도 쳐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얘기하던 때, 드디어 실이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근화는 급히 고개를 돌려 바늘 쪽을 바라보았고, 정적도 얘기를 그만두고 어떻게 낚아야 하는지를 말해주었다.

천천히 실을 감았다. 서서히 속도를 올려 실을 감는다. 실 끝에서 묵직한 것이 느껴진다. 근화는 서두르지 않았다. 정적이 알려준 대로 차근차근 물고기를 낚아 올렸다. 손에 실이 파고든다. 꽤 큰 것이었는지 상당한 힘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근화는 실을 놓지 않았다.

“아!”

[오.]

팔에 힘을 실어 강하게 잡아당겼다.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튀어 올라 근화에게로 떨어졌다. 근화는 당황한 표정으로 잉어를 바라보다가 두 손을 뻗어 품에 안았다. 잉어는 크게 몸부림쳤다. 그 길이는 근화의 팔도 넘을 것 같아보였다. 근화는 두 손으로 단단히 잉어를 끌어안고 정적을 바라보았다.

“낚았습니다!”

정적은 그런 근화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근화는 방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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